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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배드 걸스> [No.152]

글 |조연경 런던통신원 사진 |Darren Bell 2016-05-17 3,692

교도소 안의 드라마

<배드 걸스>




무대 위의 드라마


1997년 작품인 독일의 음악 영화 <밴디트>는 여성 죄수 네 명의 탈옥을 그렸다. 강렬한 밴드 음악과 통쾌한 탈주극에 대한 기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어서인지, 여성 죄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배드 걸스>도 막연히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영국 ITV에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되었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배드 걸스>는 교도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여자 장기수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교도관들의 불합리한 핍박과 인권 침해, 수감자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갈등, 안타까운 사연들과 로맨스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 이 작품은 영미 드라마 특유의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상투적이지만 매력적이다. 특히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첫 시즌을 기반으로, 드라마를 집필한 작가들이 그대로 대본에 참여했다.


캐릭터의 수가 많아 줄거리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쩐지 계속 보게 되는 드라마들이 있다. 수년 동안 끝날 듯 끝나지 않으면서 이어지는 영미 드라마들은 대체로 여러 캐릭터를 동시에 다루며 중구난방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자극적인 소재와 사건들을 적절하게 배열하여 시청자들을 붙잡아두면서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감옥을 배경으로 한 <배드 걸스>는 초반부터 악한 인물을 확실하게 알리고 나중에 권선징악의 논리에 따라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인물과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얄미운 캐릭터들, 그 안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관계들이 재미를 보장한다. <배드 걸스>는 드라마로 방영될 당시 여러 캐릭터가 등장했고, 회마다 중심인물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다뤘다. 자칫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지만 흐름을 노련하게 조절해 흥미롭게 풀어 나갔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드라마와 달리 두 시간 반 안에 모든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 뮤지컬은 그중 하나를 중심 사건으로 두고 작품을 이끌어 나가면서 다른 인물들의 사연을 곁가지로 풀어내는 방식을 택했다.



죄수들 기준의 선과 악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고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관점을 달리하면 선과 악의 구분은 얼마든지 흐려질 수 있다. <배드 걸스>의 등장인물들은 사기, 폭행, 방화, 살인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이 대부분이고, 교도소 내의 생활과 권력관계에 어느 정도 적응해 있다. 주로 장기수가 많고, 무기 징역이나 사형을 선고받은 수감자들이 권력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다 함께 부르는 이 작품의 첫 넘버는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I Shouldn't Be Here)’다. 이 넘버에서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죄목과 형기를 읊지만, 구체적인 사연까지 다루진 않는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게 되어 억울해하면서도 후회하는 그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이들이 뼛속까지 악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에둘러 보여준다.


이후 한눈에도 연약해 보이는 레이첼 힉스가 교도소에 입감되어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교도소 내의 권력관계가 묘사된다. 감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절대 악이며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은 악독한 범죄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관리하는 교도관들이다. 손발이 잘 맞는 콤비 플레이를 보여주는 짐 페너와 실비아 홀램비는 수감자들을 함부로 대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에 취해 있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곧 승진할 것이라고 들떠 있던 짐은 새로 부임한 헬렌 스튜어트에게 자신의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해 헬렌에게는 이죽거리고, 몇몇 수감자들을 편애하며 교도소에서 왕처럼 군림한다. 짐은 레이첼이 수감되자마자 그녀를 ‘특별히’ 관리해 주겠다며 생색내고, 셸의 뒤를 특별히 봐주며 수감자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통제해서 자신의 ‘통치’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짐과 실비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젊은 교도관 저스틴은 여성 수감자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게 일상이지만 내심 그들을 측은해하고 있다. 그 전까지 전혀 목소리를 못 내던 저스틴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갓 부임한 헬렌의 존재다. 헬렌은 경력이 거의 없는 신임이지만 교도소 안의 낡은 체제와 구태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다. 헬렌은 짐과 실비아의 거친 언행을 고치도록 충고하고, 수감자들을 무시하거나 폭행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한다. 처음 입감되어 주눅 들어 있는 레이첼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헬렌은 처음부터 짐, 실비아 콤비와 불협화음을 낸다.



한편, 교도관들이 없는 자리에서는 셸 도클리와 데니 블러드 콤비가 늑대처럼 다른 수감자들을 압박한다. 짐의 비호 아래 교도소 내의 마약 공급을 책임지는 두 사람은 레이첼이 수감된 첫날 밤에 그녀를 찾아가 누가 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레이첼이 짐을 찾아가 셸의 위협 사실을 알리지만 짐은 자신의 특별 관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이라며 나중에 자신이 찾아가겠다고 레이첼을 안심시킨다.  짐은 헬렌이 무기수 니키 웨이드가 가석방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하자, 그걸 방해하기 위해 셸을 시켜 니키에게 싸움을 걸도록 해 심사를 무산시킨다. 하지만 무서울 것 없던 셸과 데니의 입지는 이본이 입감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물을 남편으로 둔 이본은 그 특권을 이용해 몸수색도 거치지 않고 교도소에 들어와 수감자들에게 술을 나눠주고 밤새 파티를 벌인다. 셸과 데니는 지금껏 그래왔듯 이본을 위협하지만, 그녀에겐 전혀 통하지 않아 도리어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짐은 전에 말한 대로 밤에 레이첼의 방에 남몰래 찾아간다. 다음 날 아침, 레이첼이 식사 시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찾으러 간 짐과 저스틴은 그녀가 자살한 것을 발견한다. 짐은 저스틴을 상부에 보고하라고 보낸 뒤, 레이첼의 방으로 들어가 혹시 있을지 모를 유서를 찾는다. 레이첼의 자살 소식이 마침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있던 실비아의 무전기로 전해지자, 연이은 악재와 교도관들의 악행에 당할 만큼 당한 수감자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폭동이 진압되고 며칠 뒤, 짐은 곧 헬렌의 자리에 자신이 앉게 될 거라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실비아와 함께 자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날을 그리며 행복해한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수감자들은 내심 새로 온 헬렌의 방식을 반기던 터라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결국 식사 시간에 배식을 담당하는 줄리가 짐의 해고를 요구하며 파업을 하지만, 짐은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며 셸과 데니에게 배식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아들과의 만남이 간절한 줄리의 면회권을 박탈해 버린다. 셸과 데니가 배식하는 걸 먹느니 차라리 굶겠다며 이본이 단식 투쟁에 나서자, 다른 수감자들 역시 동참한다. 헬렌은 부당하게 권리를 박탈당한 줄리를 위해 아들의 전화번호를 알아 와 통화를 하게 해준다. 니키 사건으로 인한 상부의 경고에 따라 자신이 잠시 싸움을 멈춘 사이 짐과 실비아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눈으로 확인한 헬렌은 짐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자신이 교도소에 남겠다고 다짐하고, 저스틴도 그녀의 편에 선다. 헬렌이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진 않을 거라는 얘기를 전해 들은 짐은 확실하게 그녀를 몰아내기 위해 실비아와 계획을 세운다. 실비아는 첩보가 있었다며 불시에 수색을 단행하고, 곧바로 셸이 관리하는 배식대에서 마약을 찾아낸다. 졸지에 피해를 입은 셸은 배후에 짐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이본은 이참에 셸을 끌어들여 짐을 잡기 위한 함정을 판다. 이본이 남편을 통해 카메라를 구해 오고, 교도관 저스틴도 계획에 참여한다. 평소에 짐이 자주 찾던 셸의 방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 후, 짐의 상관이 이를 직접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셸을 표적으로 삼은 것 때문에 짐은 평소보다 경계하지만, 결국 모두가 고대하던 장면이 감시 카메라를 통해 전송되고, 짐은 그길로 해고된다. 독재자 짐이 사라지자 교도소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뮤지컬의 자격


줄거리가 복잡한 만큼 두 시간 반 동안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는 상투적이긴 해도 제법 흥미롭게 다가온다. 전형적인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어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 사연 있는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설득력 있는 연기가 관객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특히 니키와 헬렌이 서로 마음을 열다 작품 후반부에 애정 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은 니키의 가석방 심사가 확정되면서 희망적인 결말을 그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는 뮤지컬로 바뀐 이 작품에 가치를 더한 한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드 걸스>가 오른 소극장 무대는 마치 패놉티콘처럼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둡고 낯선 공간은 투박한 철망과 기둥 덕분에 더더욱 교도소의 분위기를 닮았다. 밴드 음악을 기반으로 한 넘버들은 주로 여자 배우들로 구성된 주연진과 앙상블의 목소리를 담아 때로는 거칠고 반항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을 박탈당해 지쳐 있는 모습을 표현한다.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각자의 입장과 시선을 드러내며 같은 멜로디로 다르게 노래하는 곡들은 주인공이 여럿인 이 작품의 특성을 잘 드러냈다.



또한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때의 넘버 ‘늘 그런 식이지(That's The Way It Is)’와 다 같이 짐을 곤경에 빠뜨릴 계획을 짜면서 부르는 넘버 ‘가장 나쁜 놈과 더 나쁜 놈(The Baddest & The Best)’은 여러 명이 한 목소리로 불러 더욱 폭발력이 느껴지는 강렬한 멜로디를 자랑한다. 한편으로는 줄리가 아들에게 전하는 ‘미안하다(Sorry)’처럼 안타까운 사연을 담아내거나, 헬렌과 니키가 각자 방에서 상대를 생각하며 부르는 ‘매일 밤(Every Night)’처럼 멜로디가 유려한 곡들도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좋은 넘버들이 귓가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괜찮은 안무를 보여주는 곡도 드물었다. 짐과 실비아의 쿵짝이 돋보이는 ‘감옥의 기술(Jailcraft)’과 두 사람이 헬렌을 몰아낸 후의 행복한 앞날을 상상하며 부르는 ‘미래가 밝다(The Future Is Bright)’ 정도밖에 없었다. 그만큼 <배드 걸스>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택해 무대를 채웠지만, 장르에 덜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상투적인 해피엔딩이 발목을 잡는다. 이 작품이 포문을 열었을 때부터 관객들은 수감자들이 일종의 선이고 못된 교도관들이 악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리고 결국 악한 편이 어떤 식으로든 퇴치될 것이고, 수감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것을 예측한다. 이 작품은 결국 그런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풀어 나가는 방식이다. 니키의 가석방 심사를 적극 추진하면서 다른 직원들의 반대에도 자신의 직위를 걸고 애를 쓰는 헬렌이 후반부에 결국 니키와 애정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이 작품이 드라마의 통속성에 매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요 사건들과 인물의 특징들을 시즌제 드라마에서 그대로 가져온 탓에 범죄 드라마에서 많이 본 듯한 인물들,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배드 걸스>를 전체적으로 촘촘하게 수놓고 있다. 비합리적으로 수감자들을 괴롭히는 구시대적인 교도관들과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 새로운 세대의 교도관의 대립, 나쁜 짓을 일삼지만 알고 보면 사정이 있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닌 인물 등 <배드 걸스>에는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요소가 많다. 드라마에서 출발했지만 드라마와 뮤지컬의 장점을 융합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끌어내려 하기보다, 드라마의 인기 요소만 가져와서 무대 위에 올리려고 한 안일함이 드러난 게 이 작품이 더 높이 날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재공연의 의미


런던에는 극장도 많고 배우도 많다. 그만큼 공연된 작품들도 많다. 한 작품을 탄생시키려면 공을 많이 들여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장르의 특성상, 새로 생산되는 작품이 드문 편이기 때문에 소규모 프린지 극장들은 예전에 공연됐던 작품들을 발굴해서 올리는 경우도 많다. 프린지 극장은 새 작품의 시험 무대이면서 연출, 디자이너, 배우들의 시험 무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신인 배우들과 신진 창작진들이 작품을 골라 의기투합하고, 때로는 연륜과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 힘을 보태기도 하면서 런던의 다양한 프린지 생태계를 형성했다. 크고 작은 작품들, 오래됐거나 새로운 작품들, 영국의 토양에서 자라났거나 인기를 발판으로 대서양을 건너온 작품들, 크게 투자를 받았거나 소규모로 제작된 재공연 작품들은 런던 곳곳의 작은 극장 무대를 5주, 12주씩 채우고 이내 사라진다. 그리고 가끔 그 많은 작품들 중에 하나쯤은 크게 주목받기도 하고, 웨스트엔드로 옮겨서 공연되거나 전국 투어에 나서기도 한다. <배드 걸스>도 그런 공연 중의 하나였고, 제법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10년 만의 공연이었지만 다음 재공연은 좀 더 이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2호 2016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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