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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RAVEL] 병아리 창작자들의 뉴욕 탐험기[No.154]

글·사진제공 | 김정민(한예종 음악극창작협동과정 7기) 2016-08-04 4,097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창작협동과정(이하 음창과)은 2009년 신설된 이래 올해로 8기를 맞았다. 작가와 작곡가가 협업이라는 천사 같은 이름 뒤에서 악마처럼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곳이 음창과다. 내가 속한 7기 동기들은 현재 3년 과정의 정확히 중간인 2학년 1학기의 끝에 서 있다. 사실 이 시기가 창작자로서의 고민과 유혹이 가장 많을 때이다. 뮤지컬 창작에 대해 안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모른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반 학기 후에는 졸업 작품을 써야 하고, 졸업 전에 입봉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학업에 충실하자는 의무감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시기다. 그렇게 고민만 쌓여가던 중, 뉴욕대학교 뮤지컬창작과의 졸업독회를 볼 기회가 생겼다. 현실 도피가 될지, 희망의 실마리가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 동기 일곱 명과 전임 교수님은 이미 인천발 비행기에서 내려 JFK 공항을 밟고 있었다.




뉴욕대 독회를 보다
뉴욕대뿐만 아니라 브로드웨이의 독회가 생각보다 캐쥬얼하다는 건 예전부터 들어왔으나,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한예종 음창과의 독회나 CJ 크리에이티브 마인즈 등 외부 독회들은 ‘갖출 건 갖추자’는 주의다. 음창과의 경우 대본과 음악을 쓰는 것에서부터 무대화까지 모든 과정을 창작자가 책임진다. 일반적으로 배우 섭외부터 연출, 편곡, 조명, 음향 소스 구하기, 세션 연습 등 전 과정이 작가, 작곡가의 몫이다. 기획이나 디자인은 한예종 타원 학생들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백지에서 점 하나로 시작한 글자를 관객의 눈앞에 세우기까지 전 과정을 배우는 셈이다. 창작자가 그 과정들을 익히는 것은 작품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극장과 스태프들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레 높아지게 한다.


그에 반해 뉴욕대의 독회는 정말 단순, 명료 그 자체였다. 블랙박스 극장 안에 간이 의자를 잔뜩 깔아놓고, 맨 앞줄에서 1미터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배우들이 보면대를 보며 발표했다. 총 세 팀의 졸업독회를 봤는데 모든 팀이 기본 조명만으로 공연했다. 주기적으로 조율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피아노 한 대가 세션의 전부였고, 한 팀만이 퍼커션 등 추가 악기를 썼다. 배우들은 일상 복장으로 심지어 마이크도 없이 노래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배우들의 대사, 가사, 멜로디 하나하나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별도의 기술적인 도움 없이 대본과 음악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 즉 작품 그 자체만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독회가 끝난 후 의 작가, 작곡가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이 작품은 새 삶을 찾아 낡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난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들은 1년 넘게 이 작품을 준비해 왔다고 했는데, 마침 공연을 올리던 그때까지도 시리아 난민을 비롯해 유럽 난민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다른 두 작품 또한 북한 이민자와 히스패닉 이민자를 다루고 있었다. 혹시 시의성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이 뉴욕대의 학풍이냐고 물었더니, 자신들도 그 말을 듣기 전까진 세 작품의 공통점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다. 학교는 창작자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쓰도록 돕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민자 문제는 미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들의 과거이자 현재이다. 우리가 ‘이야기의 동시대성’을 작품에 담아내야 한다고 배우는 것처럼, 그들도 자연스레 동시대성을 작품에 녹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뉴욕대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놀랍고 동시에 부러웠던 것은 배우 캐스팅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보통 개인적인 인맥이나 오디션을 통해 연극원 혹은 외부 배우들을 창작자가 일일이 캐스팅해야 한다. 그런데 뉴욕대에는 캐스팅 디렉터가 따로 있어 세 작품의 캐스팅을 도맡아 주었다. 캐스팅 디렉터가 대본을 보고 각 역에 어울리는 브로드웨이 현역 배우를 5순위 정도까지 리스트 업해주면, 창작자들은 그중 배우를 선택할 수 있다. 사실 대본을 쓰고 고치는 와중에 배우들 캐스팅까지 하다 보면, 작품이나 캐스팅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뉴욕대처럼 한 명의 책임자가 모든 작품의 캐스팅을 전담하는 시스템이라면 창작자는 작품에 집중할 수 있고, 적합한 캐스팅을 하기에도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큰 차이는 작품을 상업화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신예 창작자들이 작품을 외부에서 올리려면 현실적으로 공모전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히 크고 작은 공모전들이 있어 다양한 방법으로 신예 창작자들을 지원해 주고 있다. 그에 반해 뉴욕대 학생들은 보통 자신들의 리딩에 프로듀서를 초대하거나, 졸업 후 제작사를 직접 찾아간다. 일단 미국에는 도시마다 크고 작은 극장들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신예 창작자들의 작품이나 비영리 작품의 개발에 관심을 두는 프로듀서들이 많다. 실제로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에서는 여러 프로듀서들이 투자자를 모으기 위한 리딩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우리여서 할 수 있는 이야기
뉴욕대 독회를 본 날 동기들과 나눈 대화는 작품 자체보다도 그 외적인 것들이 많았다. 정작 그들이 쓴 작품을 보니, 장소만 달랐지 모두가 비슷하구나 싶었다. 결국 우리는 다시 ‘무엇을, 왜,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본 공연들을 간간이 언급하며 새벽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뉴욕을 방문했던 5월은 토니상을 앞두고 화제의 공연들이 많이 올라갔던 시기였다. 일행마다 차이는 있지만 <펀 홈>, <아메리칸 사이코>, <스쿨 오브 락>, <슬립 노 모어>, <마틸다>, <턱 에버래스팅> 등의 작품을 봤다.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것은 <펀 홈>과 <아메리칸 사이코>였다. <펀 홈>은 게이 아버지 아래서 자란 레즈비언 딸의 이야기로 탄탄한 대본과 장면에 잘 붙는 음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올라갈 일은 없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 자체가 너무나 미국스러운, 즉 그들이 살아온 삶이기 때문이었다. 2015년 미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기까지, 그들은 상당히 긴 세월 동안 자신들 곁에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친구들을 둬왔다. 그래서 동성애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대놓고 적대적이기가 쉽지 않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형식 면에서 충격이 컸다. EDM을 뮤지컬에 어떻게 쓸지 상상이 안 간다면, 현재로써는 그 상상의 최전선에 있는 작품이지 싶다. 컨셉이 확실한 음악에 딱 어울리는 연출, 안무, 조명, 무대, 의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관객을 압도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일찍 막을 내렸다. 실제로 뉴욕대 창작자들도 <아메리칸 사이코>에 대해 좋은 평을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뮤지컬과, 또 그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오히려 한국에서 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관객은 연령대도 낮고, 또한 EDM에 대한 관심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20~30대들은 유행에 빠르게 반응한다. 따라서 약간 올드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어법을 버리고 젊은 감각을 좇으려 시도한 <아메리칸 사이코> 같은 작품이 한국 시장에 더 잘 어울리지 않나 싶다.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이 브로드웨이에서는 외면받지만 한국에서 흥행하는 것처럼 어떤 작품이 어디서 잘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영어를 잘해도 절반도 알아듣기 힘든 브로드웨이 뮤지컬임에도 어떤 순간에는 나 역시 관객과 하나가 되어 소리내 웃기도 했고, 눈물이 저절로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그건 아마 창작자, 스태프, 무대에서 시연한 배우 모두가 자신의 옷을 입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감히 짐작컨대 아마도 모든 뮤지컬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이 고민을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맞는 옷은 무엇인가, 이 시대에 맞는 옷은 무엇인가.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담아냈을 때 관객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극장을 나가며 가슴 한쪽이 웅웅거릴 수 있을까.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 우리여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길밖에는 없다. 내가 진정성 있는 작품을 쓴다면 그게 아무리 다른 나라의 관객들에게 생소한 소재 혹은 표현일지라도 그 안의 진심은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4호 2016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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