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 프로듀서ㆍ 故이영훈 작곡가의 아내 김은옥 씨 인터뷰
<광화문 연가>는 2004년부터 故 이영훈 작곡가와 함께 이 작품을 준비해 온 방송인 김승현이 프로듀서를 맡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그가 끝내 보지 못하고 떠난 꿈의 작품을 펼쳐 보일 예정이다. 고인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평생을 그와 함께한 반려자, 그리고 꿈의 동반자였던 김승현 프로듀서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영훈과 작곡가 이영훈
김승현 80년대 초반 통기타 가수들과 함께하는 행사장에서 영훈이랑 처음 만났어요. 둘 다 무명이었던 때라 늘 ‘난 MC로, 넌 음악인으로 성공하고’ 그런 얘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죠. 그때 영훈이가 많은 곡을 피아노로 들려줬는데, 그게 나중에 다 히트를 하더라고요. 영훈이는 1985년에 이문세 씨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가 나오면서 스타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게 됐고, 저는 계속 무명 생활을 하다가 운 좋게 1991년도에 데뷔를 하게 되었죠. 영훈이는 천상 남자였어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요. 쉽게 친해지는 스타일은 아닌데, 말을 한마디해도 굉장히 따뜻하게 했어요.
김은옥 아이와 제게도 남편은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남아있어요. 물론 작업할 땐 예민해지니까 절대 근처에 안 갔어요.(웃음) 대신 피아노 반짝반짝 닦아주고, 밤샘 작업할 때 마실 수 있게 늘 커피 서른 잔 정도가 들어가는 커피포트에 커피를 가득 채워놓고, 재떨이 큰 거, 담배 두세 갑을 준비해 드렸죠. 곡을 쓰는 과정을 아주 성스럽게 생각하셔서 술을 좋아하셔도 작업할 때는 석 달이 걸려도 금주하시곤 했어요.
김승현 카리스마가 있고, 보스 기질도 있었어요. 진면목은 녹음실에서 볼 수 있었죠. 말을 많이 하는 건 아닌데, ‘쉬었다 합시다’ 한마디로 사람들을 확 긴장시키는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다정다감해서 ‘사랑하는 친구, 나의 친구 승현아’, 이런 표현의 문자를 잘 보냈죠. 이런 감성이 노래에 스며 나오는 것 같았어요.
김은옥 사실 곡 쓰는 것보다 노래 가사를 쓰는 걸 너무너무 힘들어했어요.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가사를 쓰고 싶은데, 그 작업이 아주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요.
김승현 앨범 하나 만들 때마다 수명이 3년씩 줄어드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가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예를 들면, ‘그녀의 웃음소리뿐’에서 ‘세월이 흩어 가는걸’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걸 ‘훑어 가는걸’로 할지, ‘흩어 가는걸’로 할지, 표현과 의미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그런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소주 한 잔에 풀고. 담백하게 툭툭 던지는 굵은 목소리도 좋았고. ‘허허허’ 거리는 웃음도 독특했고. 문세 씨가 영훈이랑 작업하기 전엔 꽤 얇은 목소리였는데, 함께 작업하면서부터는 영훈이가 추구하는 보컬 색깔로 바뀐 거예요. 자기의 노래와 가사의 느낌에 따라.
김은옥 그이가 좋아했던 목소리가 김현식 씨 목소리였어요.
故이영훈 작곡가
작곡가 이영훈의 <광화문 연가>
김승현 어느 날 ‘너랑 나랑 창작뮤지컬계 한구석에서 뮤지컬 <광화문 연가>를 만들고, 손질하면서 여생을 보내자’고 하더라고요. 그게 영훈이 가기 4년 전 일이었는데, 그렇게 뮤지컬의 기초를 준비하다가 영훈이가 떠났어요. 그때 영훈이의 ‘너랑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말로 여기에 뛰어들어서 열심히 배우고 있네요.
김은옥 영훈 씨가 뮤지컬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2000년도 즈음이었을 거예요. 국내에서 뮤지컬이란 장르가 인기를 얻기 바로 전이었는데, 어느 날 ‘국내엔 창작뮤지컬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씀하셨어요.
김승현 알려진 곡이든 알려지지 않은 곡이든 대중에게 새롭게 들려줄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소품집 1,2,3,4」(1993~2003)나 「옛사랑」(2006~2007) 앨범도 그 맥락에서 제작된 셈이죠. 뮤지컬은 음악에 스토리가 있는 거잖아요. 음악을 통해 스토리가 전개되면 음악이 한층 더 사람들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건 2004년부터였죠.
김은옥 영훈 씨는 <광화문 연가>에 자신의 작품 세계를 다 쏟아내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김승현 안타까운 게 있다면, 영훈이가 뮤지컬을 위해 계획하고 있던 걸 다 못하고 갔다는 거예요. 처음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뮤지컬을 위해 빠른 곡을 포함해서 몇 곡을 더 만들고, 연기자들의 동선을 위한 짧은 몇 마디도 작곡하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어요. 시놉시스까지는 만들어 놓고, 곡을 쓰지 못한 채 너무 빨리 간 거죠. 워낙 완벽주의 기질을 가지고 있던 친구라 아마 그의 머릿속엔 많은 게 있었을 텐데, 사실 그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그게 늘 의문이에요. 그래도 생전에 영훈이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다행히 몇몇 중요한 포인트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던 것이 있어서 그걸 연출부와 상의하면서 풀어가고 있습니다.
김은옥 애정을 가지고 해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승현 (웃음) 사실 부담이 많이 됩니다. 영훈이에게는 광화문이 의미가 깊은 곳이라 애초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하고 싶어 하는 맘이 있었어요. 그래도 초연이니까 처음에는 중극장에서 수정 보완해서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준비를 했거든요. 그런데 초연부터 대극장에서 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몇 장면을 대극장에 맞게 수정을 하다 보니 드라마적 요소가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광화문에서 공연을 하는 건 의미가 깊어요.
김은옥 그에게 광화문의 의미는 남달랐어요. 광화문 근처에 있는 대신 중.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고궁을 좋아해서 학교에서 수업을 받다가도 그냥 이끌리듯 조퇴해서 늘 고궁을 혼자서 돌아다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아마도 첫 사랑의 시작이 광화문이었을 거예요. 어디선가 그런 글을 봤어요.(웃음) 정말 아름다웠던 청춘의 시절을 거기서 다 지냈으니까 그렇게 광화문을 사랑할 수밖에요.
김승현 <광화문 연가>를 통해 영훈이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느끼고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영훈이에게 사랑이란, 애써 기억하거나 지우려고 하지 않아도 예전의 그 모습으로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거였어요. 부정하지도 않고, 미화하지도 않고 그냥 옛 기억인 거죠. 그것보다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더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덕수궁 돌담길은 그대로 있지만, 선배 세대들이 그 길을 통해 사랑에 대한 기쁨과 아픔을 그대로 배웠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식들, 그리고 손자들도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걸 배워가는 것, 그걸 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김승현 프로듀서(좌), 이영훈 작곡가의 묘에 헌화 중인 아내 김은옥 씨(우)
관객에 부치는 이영훈의 편지
김승현 영훈이의 음악은 가요계에 이미 한 획을 그었고,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사랑해주고 있잖아요. 제 나이 또래나 선배 나이 대 사람들은 노래 한 곡 할라치면 대다수가 ‘광화문 연가’를 부르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문세 씨의 노래로, 후배 가수들의 리메이크 노래로, 연주곡을 통해, 이제는 뮤지컬로 그 친구의 노래가 새롭게 대중의 가슴에 다가가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하고 싶은 거예요. 전 그의 음악을 듣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인생이 그의 음악과 함께 흘러갔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김은옥 그 사람이 「옛사랑」 앨범 서문에 ‘우리 모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십시오.’라고 쓴 글이 있어요. 저는 그 사람이 모든 이들에게 사랑으로 기억되는 작곡가가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광화문 연가>로 인해 사랑을 회복하고, 마음에 심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공연이 되었으면 해요. 무엇보다도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0호 2011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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