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병사? 레어 아이템이잖아!’
농담처럼 스치는 말이 촌철살인의 기지를 발휘할 때가 있다. 엊그제 조카 녀석의 말이 딱 그랬다.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뮤지컬 <분홍병사> 팸플릿을 슬쩍 보고 이 녀석이 하는 말이 기가 막히다. “분홍병사? 레어 아이템이네!” 아무리 사춘기 청소년의 변덕스런 취향이라고 해도 분홍색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녀석이 이렇게 말하다니. 물론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분홍’과 ‘병사’의 조합을 부조화가 아니라 색다름으로 받아들이는 발랄한 상상력이 꽤나 재미있었다. 레어 아이템이라. 흔하지 않아 그 자체로 독특한 가치를 자아내는 무언가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동안 학전이 공연해왔던 뮤지컬은 공연계의 레어 아이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소극장 뮤지컬 공연 중에 학전의 작품은 항상 눈에 띄었다. 해외의 작품을 우리 상황에 맞게 번안하는 고집이나, 번안의 과정에 묵직한 주제를 빠뜨리지 않는 책임의식도 그렇고, 현실과 역사의 무거운 이야기도 웃기게 눙치는 연극다운 능청스러움은 발군이었다. 그뿐인가. 최소한의 장치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무대 공간의 기능적인 활용이나, 소박하면서도 풍성한 라이브 음악의 솜씨 등등 학전의 공연은 완성도 면에서 꽤나 도드라지는 성취를 일궈왔다. 무엇보다도 학전의 뮤지컬 무대에 선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에 민망했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그동안 몰랐던 배우를 발견하는 재미, 배우의 이름값이 아니라 연기를 즐기는 재미는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쏟아지는 소극장 뮤지컬의 홍수 속에서 이만큼 개념있는 주제의식과 성실한 배우와 음악적 즐거움을 동시에 갖춘 공연을, 그것도 창작이란 범주 안에서 찾아보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15년이 훨씬 넘도록 지속하고 있다니. 이건 레어 중에서도 레어인 셈이다.
이제 학전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이다. 작품의 제목 앞에 붙은 ‘학전’ 상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 작품의 됨됨이를 신뢰하게 만드는 힘이다. 학전에서 새로운 공연이 만들어질 때마다 ‘학전’ 브랜드가 레어 아이템에서 명품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을지 가늠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마침 여기, 학전의 신상이 나왔다. 너무나 예쁜 핑크색 때깔을 입고.
‘학전다움’에 충실한 <분홍병사>
프랑스 작품을 번안한 뮤지컬 <분홍병사>는 미덕이 많은 공연이다. 그 미덕을 ‘학전다움’이라고 표현하자. <분홍병사>는 ‘학전답게’, 어린이 뮤지컬이면서도 제법 묵직한 설정을 깔고 있다. 기본적인 틀은 대형마트의 인형 코너에 진열된 인형들의 이야기이니, 소재만으로 보자면 기존의 어린이 뮤지컬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 분홍병사의 배경이 심상찮다. 고운 분홍색은 주인에게서 버림받을 때의 상처에서 흐른 피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붉은 핏빛이 고운 분홍색이 될 때까지 버려짐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분홍병사. 그러나 상처가 곰삭은 분홍색을 ‘군인다움’으로 보아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표피적으로 볼 때 분홍색의 세계와 병사의 세계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니만큼 그 사이에 끼인 분홍병사의 이야기는 곧 상처입고 버림받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린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런 이야기가 아이들에게는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시는지. 아이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는 어쩌면 삶의 비정함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동화가 진정 꿈과 희망을 담는 틀이 되려면 슬픔과 아픔이 많은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본다면 <분홍병사>는, 지금까지 ‘학전’표 공연이 그랬듯이, 아이들에게 환상의 발판은 현실임을 보여주는 지혜로운 이야기꾼이다.
이런 이야기를 재기발랄하게 전달하는 동력은 여러 군데에 있다. <지하철 1호선>으로 연기의 통과의례를 거친 학전의 배우들은 노래나 연기에서 빠지지 않는 솜씨를 선보인다. 동화책을 모티프 삼은 무대는, 다 큰 성인 배우들이 지나다니기에는 작고 좁아 불편해 보여도, 나름 간결하면서도 재미있다. 어린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갇히지 않은 세련되면서도 서정적인 음악 또한 최소한의 라이브 연주로도 귀에 쏙쏙 들어올 만큼 완성도가 돋보인다. 이러한 요소들을 재치 있게 엮는 장면 연출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일례로 매일 싸우는 아빠 엄마를 시침과 분침으로 비유한 시계 에피소드는 시계바늘이라는 소품을 재미있게 활용해 함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는 가족의 갈등을 잘 보여주었다. 하나씩 생각해볼 때 <분홍병사>에서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구석을 찾기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아직 명품일 수 없는 이유
<분홍병사>가 안타까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분홍병사>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는 아름다우면서도 재치 있고, 의미를 지향하면서도 서정적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데 모아놓으면 뭔가 비어있는 것 같으니 이 아쉬움을 어쩔까나. 눈 코 입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데가 없는데 한 군데 모아놓으면 균형이 안 맞는 슬픈 미인의 얼굴을 보는 느낌이다. 전하고 싶은 뜻이 분명하고 많은 것에 비해 그 뜻을 담아내기엔 이야기의 짜임새가 너무나도 헐거운 것이 문제일까. 이건 ‘학전다움’의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제목은 <분홍병사>이지만, 정작 분홍병사의 이야기는 처음과 마지막에 가느다랗게 걸쳐 있을 뿐 극의 줄기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에피소드 식으로 나열된 이야기의 구심점은 확실치 않을 수밖에 없다. 분홍병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가느다래지는 것은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부모의 사랑보다는 무관심에 익숙한 푸름이의 외로움도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분홍병사의 여자친구인 초라한 봉제인형 ‘메이드 인 아시아’의 등장은 만드는 이의 의도가 이야기의 흐름을 앞서가는 성급함으로만 보일 뿐이다.
푸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런 푸름이의 도움으로 분홍병사와 ‘메이드 인 아시아’가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구? 이런 결말은 시작부터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지만 과정이 느슨한 결말은 너무나 쉽고도 해맑아 그만큼 시시하다. 분홍병사의 아픔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분홍병사와의 만남이 어떻게 푸름이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한 걸까. 분홍병사와 ‘메이드 인 아시아’의 사랑을 돕는 이가 푸름이라는 사실이 왜 희망이 될 수 있는 걸까.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헐거운 이야기의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사이 <분홍병사>는 여느 아동극처럼 평범해져 버렸다. 에피소드로 분할된 노래는 아름답고 충실했지만 빠져나가는 이야기를 모두 잡아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홍병사>는 좋은 작품으로 남을 여지가 충분하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 모두에게 버림받은 분홍병사이지만, 이걸 뒤집으면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모두 좋아할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 아니겠나. <분홍병사>도 어린이와 어른 관객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듯 보이지만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저력은 그 안에 이미 넉넉하게 있다. 현실 속에서 빚어내는 동심이라. 이건 레어 아이템이 아니라 명품 아이템이다. 좀 더 촘촘해진 <분홍병사>가 이런 명품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길 바란다. 진심으로.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1호 2010년 6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