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보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앞설 때 사람은 성숙하게 마련이다. 특별함을 좇는 것은 ‘할 수 있음’을 아직 믿는 사람의 자신감이지만 평범함을 바라는 것은 ‘할 수 없음’을 이미 알아버린 사람의 삶에 대한 겸손이기 때문이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문학과 연극의 작품들이 한결같이 고통과 몰락을 이야기하고 있음은 괜히 심각해지려는 허세가 아니었다. 삶의 본질이란 이루면서 쌓아가기보다는 잃으면서 내려놓는 것에 더 가깝게 있기에, 사람살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각각의 삶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서로 인정하고 함께 견뎌내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평범함은 각자에겐 특별할 수밖에 없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내고 그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평온함이다.
<넥스트 투 노멀>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을 이토록 진지하게 담아내는 뮤지컬을 평범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넥스트 투 노멀>이 품은 문학적 사유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지평이 우리가 보았던 것보다 훨씬 넓고 또한 깊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노래와 춤이 있는 장르에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흥겨움이라는 생각. 이것은 일리(一理)는 될 수 있으되 진리(眞理)는 될 수 없다. <넥스트 투 노멀>은 삶의 상처에 대한 진지한 서사적 접근이 감성적 직설을 담아내는 음악의 언어와 얼마나 근사하게 만날 수 있는지를 세련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언뜻 보자면 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넥스트 투 노멀>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엄마의 정신질환에 있다. 17년 전에 죽은 아들을 아직도 기억에 품은 채 영원한 현재로 간직하고 있는 아내는 분명 정상적이지 않다.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은 이미 지쳐버렸고, 딸은 엄마와의 관계 맺기를 어느새 포기해 버렸다. 아내의 세계와 다른 이들의 세계는 이미 갈려버렸다. 그러나 이들을 갈라놓은 것이 과연 아내의 정신병이었던 걸까.
이 작품은 표면에 정신병을 치료하는 아내와 그 가족의 힘겨움을 배치하고 있지만 그 심층에 깔려있는 이야기는 상실과 기억에 대한 것이다. 생후 8개월 된 아들을 잃어버린 것은 남편과 아내에게 똑같은 상실의 상처이지만 아내는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고 남편은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자 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생긴 부재(不在)의 공간은 분명 텅 비어있다. 하지만 그 비어있음을 공유하는 기억이 있는 한, 부재하는 실존은 기억 속의 실존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다. 상실이 영원한 상처가 아닌,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치유란 상실을 부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그때의 비어있음이란 서로가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빈 공간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다. 남편은 아들이 사라진 부재의 기억을 아예 없앰으로써 아내의 아픔을 치유하려 하고, 아내는 아들의 존재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 남편과 그 상실의 기억 속에서 만날 수가 없다. 원래부터 존재는 사라짐을 통해서 가장 강하게 자신을 증명한다.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있음’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편은 아내의 옆에 살아있지만 그의 ‘있음’은 아내에게 ‘없음’과 다르지 않다. 상처를 공유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없는 듯이’ 살아가는 그들은 모두 아픔을 품은 채 외로울 뿐이다.
무엇으로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딸에게 남자 친구가 고백하는 것처럼, 미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삶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나의 안전한 세계로 너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너의 나락으로 내가 발을 디딤으로써 함께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사랑이라면.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 너의 아픔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사랑이라면. 결국 아내는 집을 떠나지만, 아내가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과거에도 있었던 상실의 빈 공간을 보기 시작한 남편의 홀로 있음을 외로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치유란 상처를 똑바로 바라볼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넥스트 투 노멀>의 이야기는 이렇듯 주제의식의 깊이에서뿐 아니라, 주제를 전개시키는 이야기의 배치에서도 감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아내와 남편의 사랑을 딸과 남자 친구의 사랑과 포개놓으면서 서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빚어내는 식이다. 세련된 극작이다. 이런 세련됨은 무대에도 적용된다. 무대 전면을 3층으로 분할함으로써 높이와 넓이를 전체적으로 활용한 무대 공간은 극의 분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드는 시각적 상징으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한다. 겉으로는 아기자기한 집의 그림이 투영되지만, 차가운 철제 빔으로 구획된 공간구성은 서로의 세계에 갇혀버린 사람들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이야기의 빠른 전환과, 내면과 사건을 오가는 이야기의 구성을 잡아내기에 3층까지 모두 활용하는 배우의 동선은 더없이 효과적이었고, 오케스트라의 시각적 배치 또한 조화로웠다. 단지 시간의 흐름과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전환의 부지런함은 무대의 상징적인 그림에 비해 다소 설명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배우가 움직이기엔 다소 불편할 만한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몰입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움직임에서나 감정의 표현에서 김지현, 이정열, 최재림, 오소연 등 이 작품의 배우들은 모자라지 않은 기량을 보여준다. 물론 배우들이 가장 빛난 곳은 음악적인 면모에서이다. 이 작품의 음악은 이야기의 전개뿐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마치 대사를 통해 묘사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실감케 만든다. 가사의 내면과 선율의 질감이 이렇게 잘 어우러질 수 있다니. 음악이 그 자체로 드라마를 이룬다. 하지만 배우들의 빼어난 성량과 진지한 표현이 없었다면 이 음악의 진가를 발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이들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음악의 면모를 버겁지 않게 넉넉히 객석에 전달했다.
이렇듯 만만찮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넥스트 투 노멀>은 관객들에게 낯설고 어색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진행보다는 내면의 흐름이 강하고, 그러기에 노래의 가사는 마치 희곡의 대사 같은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 음악의 선율에 얹혀 흘러가 버리는 가사의 의미를 귀에 꽂히는 대사를 들을 때처럼 순간적으로 잡아내기란 쉽지 않을 수밖에. 극이 몰입을 이끌어내기에 이 작품이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데에는 연출적인 배치뿐 아니라 이런 이유도 적잖을 터다.
그래도 이런 것이야말로 브로드웨이의 진정한 저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브로드웨이가 작품의 저력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스위니 토드>에서부터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거쳐 <넥스트 투 노멀>까지 꾸준히 국내 무대에 소개하는 제작사의 뚝심이 있으니 이 고집도 본토의 저력에 지지 않는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또 다른 갈래를 증명하는 <넥스트 투 노멀>은,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0호 2012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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