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피살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엇갈리고 있다. 왕비로서 국정을 주도해 나라를 망치게 한 원흉이라는 비난과, 나라를 지키다 희생당한 난세의 여걸이라는 해석까지 극단적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평가에는 늘 ‘황후’만 있었고, ‘여자’ 민자영의 삶은 없었다. 그래서 서울예술단의 새로운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민자영을 조선의 국모나 망국의 장본인으로 표현하는 거대담론의 관점이 아니라,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죽지 않았다?’라는 팩션으로부터 미스터리 판타지를 도출한다.
작품은 우선 이야기의 축을 궁중에서 궁 밖으로 확장시킨다. 기존 역사물들이 명성황후를 구심점으로 했다면,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또 하나의 주인공인 ‘휘’를 등장시켜 서사의 축을 두 개로 설정한다. 휘는 어머니를 명성황후에게 잃은 인물로, 그에게 복수하려는 일념을 지니고 있다. 가상의 인물인 그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드라마가 기존에 알려진 역사와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판타지가 이 작품의 동력원이 된다.
극의 첫 장면 역시 궁중이 아닌, 늙은 휘가 운영하는 낡은 사진관을 비춘다. ‘사진’은 이 작품을 있게 한 중요한 모티프다. 잘 알려졌듯이 오늘날 전해지는 명성황후의 사진들은 본인이 아니라 궁녀라는 설이 있을 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창작진은 이로부터 또 하나의 가상 인물인 궁녀 ‘선화’를 등장시킨다. 그는 휘의 죽마고우이자 연정을 품은 상대이지만 명성황후 대신 희생당하고 만다. 거대한 권력의 충돌 아래 스러지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는 지배층의 역사와 결합해 역동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명성황후는 적어도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는 대원군과 맞서며 국정을 주도하던 여걸이 아니다. 궁녀 선화처럼 평범한 삶을 꿈꾸는 ‘여자’다. 다른 궁녀들에게 눈을 돌린 지아비 고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명성황후의 마음의 상처는 배우 차지연의 캐스팅으로 이 작품을 대표하는 애절한 넘버로 표현된다.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 작품에서 명성황후는 초반에는 혼령으로 휘의 사진관을 방문하고, 과거에서는 생전의 모습으로 등장해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주류 역사와 민중사를 결합해 만든 판타지인 만큼 기존 명성황후 관련 서사의 인물들도 재정비됐다. 대원군의 비중은 대폭 축소됐고, 김옥균은 갑신정변과 맞물려 ‘조선판 앙졸라’로 변신한다. 이처럼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황후의 ‘다른’ 모습들에 포커스가 맞춰진 가운데, 휘가 스토리텔러 역할을 하며 황후가 ‘잃어버린 얼굴’을 찾는 여정을 돕게 한다.
대본은 장성희 작가가 맡아 명성황후에 대한 영웅적 해석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한다. 창작뮤지컬 <빨래>의 작곡가인 민찬홍은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음악 요소들이 어우러진 스타일을 시도한다. 또 정혜진 서울예술단 예술감독이 직접 나서 설치 미술을 활용한 모던한 무대를 구현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은 이지나 연출이 서울예술단의 대표작인 <바람의 나라>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9월 22일~29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02) 523-0986
한 줄 평 : 재해석된 명성황후와 가상 인물의 매력이 어떤 시너지를 보여줄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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