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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결혼과 사랑, 우정에 관한 다양한 시각을 유쾌하게 풀어낸, 뮤지컬 <웨딩펀드> [No.70]

글 |이민경(객원기자) 사진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2009-08-05 6,362

`나에겐 오래된 적금통장과 낡은 다이어리가 하나 있다` 세연의 내레이션으로 공연의 막이 오르고 곧바로 무대 천장에서 적금통장 하나가 내려온다. 수학강사인 세연, 만화가인 정은, 오래 전부터 백조로 지내는 지희, 스물아홉 세 친구가 바로 이 통장의 주인이다. 이들은 지난 10년간 모은 적금을 가장 먼저 시집가는 사람에게 몰아주기로 약속하고 함께 적금을 부어왔다. 그 액수는 무려 3,825만 원. 그런데 이들 중 지희가 선본 지 한 달밖에 안 된 남자와 결혼발표를 한다. 20대를 다 받쳐 모은 돈을 지희에게 주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 정은과 세연은 3,825만 원을 사수하기 위해, 5월 안에 결혼하기란 황당한 목표를 향한 눈물겨운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연의 오랜 친구인 성호를 포함한 다양한 캐릭터의 남성들을 등장시키며 각기 다른 결혼과 사랑, 우정에 관한 시각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옛 사랑을 잊지 못해 그가 남기고 간 다이어리를 간직하고 있는 세연, 오랜 기간 시험 준비 중인 남자친구가 합격해 결혼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정은, 여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백조로 지내며 신부수업 중인 지희, 세 여자를 비롯해 극중 등장하는 캐릭터들엔 어느 정도의 과장성이 보태지긴 했지만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특히 적금통장을 사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여자들의 미묘한 질투 심리에는 공감대가 더욱 큰데, 이 작품에서는 이런 질투 심리를 ‘먼저 결혼하기’라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성에선 다소 벗어나지만,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여자들의 심리만은 공감대를 얻기에 충분하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활용해 적금통장 사수의 과정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반복된 장면으로 인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세연이 결혼 상대자를 고르기 위해 남자들을 하나 둘 만나는 과정’에선 그들의 캐릭터에 확실한 변화를 주면서 오히려 극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부분의 일등공신은 단연 전병욱인데, 그는 원조 멀티맨의 명성답게 세연의 오랜 친구 성호 외에도 일과 자신의 성공에만 관심 있는 거만한 대기업 직원, 철없는 마마보이 후배, 결혼을 앞둔 옛 연인 강진석 등으로 다양하게 분하며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특히 ‘샹젤리제’를 부르는 장면에선 베테랑 배우만의 능숙한 애드리브가 돋보였으며, 전병욱표 특유의 능청맞은 연기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전병욱 외에 정은 역의 박혜나가 유독 눈에 띈다. 시종일관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무대 곳곳을 누비며 시원스러운 가창력과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뽐내던 그는 ‘에로연애’ 등에선 요염한 매력까지 발산하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웨딩펀드>의 묘미는 상황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넘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연극 <오월엔 결혼할거야>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단순히 연극에 노래만 추가된 것이 아닌, 넘버들이 극의 상황과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극의 흐름을 극대화시키고,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 텍스트만으로 다 표현해내지 못한 캐릭터의 부연설명 또한 넘버가 대신해주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며 백조 생활을 하고 있는 지희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박지희 독한 년’, 성적으로 개방된 생각을 갖고 있는 정은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에로연애’, 그리고 옛 사랑 진석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세연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대, 지금 어디 있나요’ 등이 그것이다.

 

다이어리 속지를 펼쳐놓은 모양으로 꾸며진 무대는 20, 30대 젊은 여성들의 취향과 잘 어울렸다.

동시에 마치 남의 다이어리 속을 훔쳐보는 것 같은 재미도 느끼게 해준다. 다이어리는 무대 세트로 외에 진석에 대한 세연의 미련을 나타내주는 역할을 하는데, 세연은 진석과의 재회 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의 다이어리를 버림으로써 미련도 함께 정리하겠다는 마음을 표현한다. 무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날짜 칸은 퍼즐조각처럼 분리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진석과의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리는 장면에서는, 현실과 회상 장면을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서 펼쳐내면서 세연이 느끼는 과거와 현실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더욱 넓혀놓았다.

 

세련된 연출 또한 극을 매끈하게 이끌어 가는데 일조하고 있다. 결혼 상대자와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지희의 모습과 세연과 정은이 ‘박지희 독한 년’이란 넘버를 열심히 부르며 속을 끓이고 있는 모습을 한 공간 안에 배치해 두 커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세연과 정은이 처한 상황의 대조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회상 장면과 현실 사이의 전환도 굉장히 자연스러운데, 세연과 진석의 재회 장면에서 현실로 전환되는 부분을 무대 위쪽에 자리한 다이어리의 요일에 순서대로 불을 밝히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나타냈다. 웨딩샵에서 진석과의 재회를 상상하던 세연이 현실로 돌아오는 부분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이 장면에선 ‘그대, 어디 있나요’를 부르며 등장한 진석이 넘버가 마무리 될 즈음에 ‘그대, 봉투 붙였나요’로 가사를 바꿔 부르며, 순식간에 진석이 지희의 결혼상대자로 변하면서 그 상황이 세연의 상상이었음을 알려준다.

 

 

<웨딩펀드>는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무대와 세련된 연출, 언어의 미학을 충실히 실현해낸 대본, 상황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넘버, 실력 있는 배우들이 조화를 이루며 완성도 높은 극을 탄생시켰다. 여기에 관객들에게 단지 웃음만을 던져주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 마음보다는 조건을 우선시하는 요즘의 결혼 세태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며 진정한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게 한다. 단지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너무 희화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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