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 열녀칼멘수절歌!
매력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치명적’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참 절묘한 수사법이다. 매력이란 감각의 끌림이 판단의 논리보다 훨씬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불가항력의 자기장이기 때문이다. 중력이 사물을 부여잡듯이 매력은 사람을 휘어잡는다. 여기엔 어떤 설명이나 당위도 필요 없다. 그 이끌림의 결과가 자기파멸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비합리의 판타지. 그래서 이런 매력을 그대로 의인화시키는 것은 자연히 극적일 수밖에 없다.
카르멘은 그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모든 남자는 카르멘을 사랑하지만 아무도 카르멘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니. 타인에게는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료되지 않는 카르멘의 허무는 결국 자기 자신마저 파멸로 몰아넣는다. 문학적이지 않나. 수많은 사랑의 고백과 열정이 죽음으로 치닫는 순간에도 카르멘이 보여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없다는 것이니 말이다. 카르멘의 매력이 치명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뮤지컬 <카르멘>은 이런 결론을 따르지 않는다. 카르멘의 매혹과 정열은 가져오되 허무함은 내려놓았다. 허무의 빈공간이 사라진 카르멘에게 모든 것은 실체가 되어 버린다. 호세를 ‘갖고 놀지 않고’ 정말 사랑해버리는 거다. 그러다보니 카르멘의 매력은 치명적인 것에서 지고지순함으로 바뀐다. 호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흰옷 입은 카르멘은 팜므파탈이라기보다는 열녀춘향에 가깝다. 이런 변화, 낯설지 않다. 뮤지컬로만 오면 옴므파탈 돈주앙도 경건한 회개 기도로 인생 마무리 짓더라. 그러니 이건 뮤지컬 <카르멘>을 아쉬워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주위 사람을 파멸시킬 정도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은 로맨스 판타지의 정점이지 빈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매력적인 집시 카르멘이, 어떻게 사랑에 모든 것을 걸게 되는지, 이 두 가지를 잘 보여주기만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카르멘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무능한 극작술
그런데 뮤지컬 <카르멘>은 첫 번째 조건에서부터 삐걱댄다. 물론 카르멘이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건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매력이라는 것이 그냥 딱 보면 바로 느낌이 오는 강렬함이라는 것도 맞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카르멘의 매력은 봐서 알게 된다기보다는 듣고 이해하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 내가 어떤 여자인지 설명해주지!’ 카르멘의 모든 넘버의 가사가 이런 식이다. ‘인생은 축제, 너의 느낌에 충실해’를 비롯해, ‘니 인생을 살아봐, 뜨겁게’라든지, ‘니 안의 너를 발견해봐, 넌 특별해질 거야’ 등등.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카르멘은 자신의 매력을 자기 스스로 웅변한다. 그 모습이 팜므파탈이라기보다는 여성들의 자기계발을 위한 설교자 같다. 카르멘의 매력에 주위 사람들이 파멸하기는커녕 용기와 사랑을 얻으니 말이다. 뇌쇄적인 팜므파탈이 씩씩한 홍익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사실 카르멘의 경직된 캐릭터는 극작의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비롯된 결과일 뿐이다. 뮤지컬 <카르멘>의 극작술은 눈에 띄게 무능하다. 사건을 통해 인물의 관계가 설정되고, 그 관계 안에서 갈등이 빚어지며, 그 갈등이 파국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극작술의 기본 옵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 안에는 이런 요소가 하나도 없다. 인물과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가운데 극적인 사건이 구축되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구축되는 게 정말 하나도 없는 거다. 사건은 그냥 처음부터 ‘주어진다!’ 호세와 카르멘은 마주쳤다가 바로 사랑에 빠지는데, 처음 만나자마자 사랑이니 윤리이니 유혹이니 배신이니 논쟁을 벌이더라. 이런 학구적인 사람들을 봤나. 호세와 카르멘이 가까워지는 ‘과정’ 따윈 필요 없다. 그저 둘이 죽도록 사랑하는 ‘결과’만 나오면 되는 식이다. 그럼 과정은? 그냥 설명하면 된다. ‘호세랑 카르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서?’ 동료들의 이런 대사 한 마디면 둘의 사이는 그냥 깊어진 거다. 그래서 극의 이야기는 연결되지 않고 분절된다. 드라마다운 전개가 필요한 이야기에 이런 삽화적인 설정은, 물론 의도한 것도 아니겠지만, 너무나 적절치 않다. 카르멘과 호세의 결과 뻔한 사랑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으니 이걸 어쩌랴. 세 시간의 공연 시간이 영원과도 같아지는 까닭이다.
화려하지만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이렇다보니 볼거리가 화려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확실히 이 작품의 관심은 이야기보다는 볼거리에 있다. 극이 시작하자마자 카르멘의 플라멩고로 시작해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마술쇼에 네온 달린 파티션까지 무대 위는 관객의 시선을 끌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례로 회전 무대 위에서 병풍처럼 펼쳐지는 무대 파티션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도 유능하고 그 아이디어의 기발함이 돋보였지만 그 기발함이 그저 설명적인 재현에 그쳐버린다는 사실은 무척 아쉽다. 배우보다 더 분주하게 등퇴장을 반복하는 무대.
이런 점은 비단 이 작품만의 문제는 아닐 거다. 그동안 숱한 대형 뮤지컬의 공간적 무대 구현이 축적한 창의성이 무엇인지, 제작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만큼 무대 연출의 외관은 화려해지고 아이디어는 돋보이지만 그것이 극적 상상력과 창조적 해석으로 충분히 이어지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휘황찬란하게 만들어놨는데 그것이 그저 볼거리에만 그쳐버린다면 그건 그저 낭비일 뿐이다. 이런 볼거리에 힘을 쓰기 전에, 서커스 장면을 제외하고는 병풍처럼 서있는 앙상블이나 인질로 잡히기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는 카타리나의 민망한 배려부터 다듬어야 할 거다. 시대를 종잡을 수 없는 의상과 소품의 설정 또한. 집시의 의상은 조로의 시대를 연상시키는데, 젊은 아가씨들은 1930년대에 등장한 입술 소파에 앉아 있더라. 게다가 해설자도 아니요 등장인물도 아닌 정체불명의 운명론자 아주머니는 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고. 오호, 이거야말로 글로벌주의에 기반한 탈시대적 상상력인데.
마술도 그렇다. 이미 대단한 마술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에, 극적 개연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 작품 속의 마술은 더 이상 신기해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큰 인형놀이에 더 눈이 가더라. 이게 더 연극적이지 않나. 무대 위의 마술이란, 실제 마술을 조잡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공간 안에서 그 많은 장면의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데 부족함이 없는 공간적 상상력에 다름 아니다. 이게 더 신기하고 멋있다. 그리고 음악. 무대와 함께 이 작품이 힘을 주는 건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이다. 그런데 제아무리 와일드혼의 음악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극에 개입하는 건 곤란하다. 서정적인 넘버가 서사적인 역할까지 감당하려 하니 노래가 나오는 순간 그나마 진행되던 빈약한 이야기전개는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듣기 좋은 꽃노래로 삼 세 번이라고, 너무 많은 감성에 기억에 남는 넘버는 없다. 그래도 마지막 노래를 인상 깊게 만든 건 차지연의 가창력 덕분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차지연의 카르멘에게서 <조로>의 루이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차지연 탓이 아니다. 차지연의 연기에는 언제나 무대를 향한 성실함이 배어있다. 그 성실함을 뇌쇄적인 매력으로 끌어내지 못한 데는 대본과 연출을 비롯한 여러 이유가 있을 터. 그에 비해 신성록의 경직된 연기는 아쉽다. 이 작품에서 두 사람만 등장하는 장면이 꽤나 많은데 솔직히 ‘케미’는 폭발하지 않더라. 강박에 매인 매혹과 열정은 아무런 설렘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욕망의 허무함이 됐건 사랑의 지고지순함이 됐건 말이다. 화려함의 강박에 사로잡힌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초점 잃은 화려함은 지리멸렬해지기 십상이다. 이제 뮤지컬의 치명적인 매력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4호 2014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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