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로 대체된 극중극
밥 포시의 화려한 안무와 연극적인 연출로 유명한 <피핀>이 런던 메니에 초콜릿 팩토리 극장에서 현대적인 하이테크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지난 12월 7일에 개막한 메이드 인 런던 버전의 <피핀>은 스테판 슈왈츠의 70년대 팝송 스타일의 음악과 가사, 그리고 로저 허슨의 극중극 형식의 대본을 비디오 게임의 가상현실 세계로 각색하고, 밥 포시의 안무를 로봇 춤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피핀>은 원래 밥 포시가 연출과 안무를 맡아 1973년에 토니상 5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던 작품이다. 중절모와 펠비스(골반)를 활용하는 밥 포시의 전형적인 안무 스타일을 비롯해 당시 뉴욕에 유행하던 70년대의 실험연극 스타일을 적극 활용한 이례적인 형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공연이다. 원작은 관객에게 직접 대사를 던지는 내레이터가 일련의 배우들과 함께 등장하여 피핀 왕자의 이야기를 상황극 형식으로 진행한다. 세상의 중요한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 권력, 예술, 종교, 사랑 등을 주제로 각각의 상황에서 피핀 왕자가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다. 수시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가 적극 활용된 작품으로, 배우들은 ‘여기 조명을 좀 더 비춰 달라’거나, ‘음악 좀 꺼 달라’는 요청을 통해 끊임없이 연극적인 상황임을 환기시킨다. 또한 뉴욕의 아방가르드 실험극적 요소가 반영되어, 극의 마지막에 피핀 왕자를 연기한 배우에게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으니 대신 화려한 피날레를 위해 휘발유를 몸에 뿌리고 무대에서 분신자살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내레이터가 무대와 조연 배우를 모두 철수하고 조명까지 꺼버린 후 텅 빈 무대에 주인공 피핀의 일행만 남겨놓고 퇴장해 버리기도 한다.
이번 런던 무대에서는 이러한 70년대 실험극적인 요소들이 21세기 컴퓨터 게임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연극적인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형광색 조명이 난무하는 컴퓨터 프로젝션으로 대체되고, 상황극의 리더인 극 중 내레이터는 비디오 게임의 가이드이자 리딩 플레이어가 된다. 그리고 원작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연극을 선보이던 배우들, 즉 피핀 왕자를 비롯한 주요 극 중 인물들은 비디오 게임의 플레이어들이 된다. 그렇게 해서 샤를마뉴 대제가 다스리는 왕국은 극 중 현실에서 게임의 가상현실로 탈바꿈한다.
비디오 게임 속 플레이어로 변신한 피핀
화려한 무늬의 검은 양복을 입은 멋진 모습의 리딩 플레이어가 마치 TV쇼의 사회자처럼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그는 로봇처럼 실버톤의 타이즈 의상을 입은 코러스들과 함께, 중세의 전사들이 멋지게 전투를 하고 사랑을 즐기는 ‘마법’과도 같은(오프닝 뮤지컬 넘버 ‘Magic To Do’) 환상의 비디오 게임, ‘피핀’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 게임에 도전할 플레이어를 찾는다. 잠시 후, 공연장 입구에 컴퓨터를 앞에 놓고 앉아 있던, 스태프로 보이는 평범한 청년이 첫 번째 플레이어로 지목된다. 청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무대에 나와 의상도 없이,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 그대로 이 신기한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이 청년이 플레이어 1, 즉 피핀 왕자의 캐릭터로서 게임을 시작하여 레벨 1의 세계로 들어가면, 가상현실인 샤를마뉴 대제의 왕국으로 장면이 이동한다. 그렇게 하여 피핀은 주어진 게임의 상황 속에서 자기 역할을 완수하며 다음 레벨로 넘어가게 된다. 각 레벨은 원작 뮤지컬의 각 장을 그대로 따른다. 가족과의 관계를 다룬 ‘고향’, 전투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영광’, 육체적인 사랑을 경험하는 ‘육체’, 아버지를 죽이고 모반을 성공시켜야 하는 ‘혁명’, 왕이 되어 새로운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권력’, 그리고 ‘예술’, ‘종교’, ‘사랑’ 등을 다루며 총 9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든 레벨을 통과하면서 피핀이 완수해야 하는 최종 임무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레벨 1 ‘고향’이 시작되고, 아버지인 샤를마뉴 대제를 비롯하여 계모 파스트라다, 이복동생 루이스 등 다른 플레이어들이 등장한다. 피핀에게는 가족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설 자리와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피핀은 다른 가족들과 달리 대학 교육을 받아 정신적으로 월등한 존재이나, 전쟁과 살육, 질투와 음모가 난무하는 중세의 세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삶을 사는 젊은이이다. 그렇기에 레벨 1에서는 먼저, 정신적으로 열등하지만 육체적으로 강한 동생 루이스와 비교하여 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자신도 전쟁터에 따라갈 수 있는 허락를 받아낸다. 이어지는 레벨 2에서 피핀이 칼을 들고 중세 전사들과 싸우는 모습은 비디오 게임에서 익히 보았던 이미지처럼 화려하게 펼쳐진다. 로봇 복장인 타이즈 위에 망토를 두르고 헬멧을 쓴 코러스들이 게임 속의 전사들로 열연하며 피핀과 칼싸움을 한다. 이 장면에서 잠깐 동안 피핀이 벽에 투사된 검은 그림자 영상을 상대로 결투를 벌인다. 영상과 배우의 동작이 빈틈없이 일치했고, 칼날 부딪히는 음향 효과가 더해져 단순하지만 특별한 무대를 보여줬다. 전투에 승리한 피핀은 레벨 2를 무사히 통과한다. 그러나 많은 생명을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살고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가서 ‘인생 순식간이니 그냥 즐기면서 살라’는 단순하면서 현명한 조언을 얻는다(‘순식간(No Time At All)’). 할머니의 조언에 힘입어 피핀은 레벨 3 ‘육체’로 넘어가 많은 여자들과의 육체적인 사랑을 시도한다. 이 장면은 인터넷 화상 채팅 이미지를 활용했다. 네 명의 여자들이 네 개의 스크린에 나타나 채팅을 통해 경쟁하듯 피핀을 유혹한다. 그리고 여자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해 피핀과 춤을 추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레벨 3까지 시작 부분은 컴퓨터 게임의 상황을 가져와 <피핀>을 새롭게 풀어내 나름의 효과를 발휘했다. 프로젝션 영상을 사용한 시각적인 화려함이 소극장의 크지 않은 벽면을 가득 채우며 특이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현대적인 이미지로 되살리지 못한 원작의 메시지
하지만 연극적으로 크게 잃은 것이 있다. 비디오 게임 버전의 이번 공연에서는 시각적 화려함에 가려서 섬세한 인간관계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극의 초반에는 아버지 샤를마뉴 대제와 아들 피핀의 편치 않은 부자 관계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원작에서는 자기보다 많이 배운 아들 앞에서 불편해하는 아버지, 그리고 학살을 일삼는 전제 군주를 아버지로 둔 왕자 피핀의 고뇌가 단순하면서도 가슴 찡한 블랙 유머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게임 속 캐릭터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쳐, 부자 관계의 묘한 긴장감이나 갈등의 암시가 전혀 표현되지 못했다. 또한, 작품의 주제 전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피핀이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나 피핀의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 ‘순식간(No Time At All)’ 역시, 원작에서 보여줬던 반짝이는 빛을 잃었다.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심각한 고뇌를 안고 찾아온 손자에게 시골 할머니가 반 농담조로 즐겁게 들려주는 위로의 노래인 이 뮤지컬 넘버는 재치 있는 인생의 깨달음을 담은 곡이다. ‘인생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다. 인생 잠깐이야, 연애나 하고 놀아라’ 하는 식의 장난기 가득한 할머니의 말은 어쩌면 고뇌와 우울에 찬 젊은 왕자 피핀에게는 한 모금의 청량한 우물물처럼 신선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공연에서도 이 순간만큼은 프로젝션을 모두 끄고, 소박하게 빈 무대에 서서 할머니 역할을 맡은 중견 배우 루이스 골드가 감칠맛 나게 이 노래를 불러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다. 그러나 이 장면의 소박한 연극성이 빛날수록, 정신없이 화려한 비디오 게임 버전의 공연에서는 맥락을 잃고 동떨어진 장면이 되어 버렸다. 물론 부분적으로 중세시대의 전투 신이나 인터넷 채팅을 통해 여자 헌팅을 하는 장면 등은 컴퓨터 속 세계를 통해 비교적 효과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피핀>은 연극적인 여정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 왕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컴퓨터 게임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물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를 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긋남은 피핀이 교회에서 기도하는 아버지를 찾아가 살해하는 레벨 4 ‘혁명’에 이르면서 점점 악화된다. 조용히 찬송가가 울리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장면 역시 게임 분위기의 요란한 프로젝션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왕이 되어 토지 개혁을 시도하고 세금을 철폐하는 장면인 레벨 5 ‘권력’은 마치 퀴즈 게임을 하는 것처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도, 자진해서 이를 포기하고 원작처럼 간단히 대사를 주고받는 연극적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레벨인 ‘예술’과 ‘종교’에 이르면서 비디오 프로젝션의 사용은 점점 효과를 잃어간다. 마지막 레벨 9에 이르면, 피핀이 시골에 사는 과부 캐서린의 집에서 우울증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으면서 비디오 게임의 효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죽은 오리를 놓고 피핀과 캐서린의 어린 아들 테오가 슬퍼하는 장면이나, 이 두 사람과 정이 들어 그냥 조용히 시골에서 집안일이나 도와주면서 한동안 살게 된다는 설정은, 사실 매우 소박한 연극적인 설정이기에 비디오 프로젝션이나 게임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해서 이번 메니에 초콜릿 팩토리의 <피핀>은 비디오 게임으로 멋지게 시작했다가 작품 중반 어딘가에서 원작의 연극적인 설정으로 돌아오고, 작품이 다 끝날 무렵에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게임을 중도 포기한 피핀에게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라고 요구하는 어이없는 내용이 되어버렸다. 비디오 게임을 하다가 마지막 레벨을 넘지 못했다고 해서 화려한 결말을 위해 분신자살을 하라는 것은 근거 없는 도약이다. 원작에서는 실험극의 형식을 택했고, 1965년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자살했던 실존 인물 노만 모리슨을 소재로 분신자살 장면을 연출했던 피터 브룩의 실험 공연 <유에스>와 유사한 방법으로 충격적인 장면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 런던 공연에서는 비디오 게임이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사회적 저항의 행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답하지 못한 채로, 평범한 청년 하나가 게임에 실패하자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멍하니 무대에 서 있는 상황을 맞는다. 그리고 게임의 룰을 어기고 먼저 쫓겨났던 캐서린과 그의 아들 테오가 게임 속 플레이어가 아닌 현실의 인물로서 그의 곁에 찾아와서 위로한다. 그러자 화가 난 리딩 플레이어가 비디오 영상과 음악을 다 끄면서 게임을 중지한 채, 코러스를 모두 데리고 퇴장해 버린다. 그러면 피핀의 일행은 조용한 무대 위에 잠시 남아 있다가 퇴장한다. 그런데 꼬마 테오가 퇴장을 하다 말고 다시 들어온다. 그러면 게임의 리딩 플레이어가 다시 코러스를 데리고 등장하고, 비디오 게임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면서 공연이 끝난다.
아쉬움과 나름의 성과
이렇게 이번 <피핀> 공연은 전체적으로 스타일의 일관성을 잃어버린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삶의 반짝이는 순간을 찾고자 하는 주제 정신이 산란한 비디오 게임의 무대 효과 속에서 그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는 나름의 즐거움을 준다. 연출가 미치 세바스찬의 쉴 새 없이 몰아가는 박진감 있는 연출이 나쁘지 않았고, 저예산 비디오 이미지를 활용한 티모시 버드의 무대 디자인을 통해 원작이 보여준 ‘시대정신을 살린 실험성’을 나름의 방법으로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원작만큼 좋지 못했고, 오히려 작품의 내용과 상충하는 형식으로 혼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이번 무대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은 것은 밥 포시의 오리지널 안무를 훌륭하게 재창조해 낸 쳇 워커의 동작들이었다. 특히 밥 포시는 대본 집필 과정부터 참여해 5분가량 대사나 노래 없이 춤이 지속되는 장면이 두어 번 정도 있는데, 열네 명의 젊은 캐스트가 열심히 연습한 흔적이 역력한 군무 장면들은 특별한 순간을 제공했다. 또한 장난꾸러기 같은 할머니 역으로 한 장면이지만 명장면을 연출한 루이스 골드의 열연과, 내레이터 역할의 맷 라울이 보여준 존재감 있는 연기와 가창력이 훌륭했다. 사악한 피핀의 계모인 파스트라다를 연기한 프랜시스 루펠레의 몸을 던진 연기와 허스키 보이스가 아름다웠다. 피핀과 그의 애인 캐서린을 연기한 해리 헤플과 칼리 보덴은 젊지만 넘치는 에너지로 흠잡을 데 없는 주인공 커플 연기를 소화했다. <피핀>은 런던 메니에 초콜릿 팩토리에서 오는 2월 25일까지 공연한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0호 2012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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