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더뮤지컬>에 나오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 못했어요.” 인터뷰 시작 전, 정단영은 요즘 자신을 향해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데뷔 무렵 앙상블로 참여했던 작품의 여주인공이 돼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인터뷰 소감이 남다를 법도 하다. “앙상블로 처음 무대에 섰을 때가 한창 진로 고민에 빠져있던 시기였거든요. 그게 벌써 10년 전인데, 그땐 지금까지 뮤지컬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어요. 뮤지컬을 이만큼 좋아하게 될지도 몰랐죠. 이 모든 일이 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에요.” 팔다리가 가늘고 긴 체형과 눈에 띄는 춤 실력, 그녀의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짐작하겠지만, 정단영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무용을 배워온 발레리나 지망생이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접한 공연 한 편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기 전까진 말이다.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보여주셨는데, 춤이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클래식하면서 현대적인 안무가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장르가 뭘까 찾아봤더니 댄스 뮤지컬이더라고요. 뮤지컬이 뭐지? 뮤지컬 한번 해보자 생각하게 된 거죠.”
2003년 <킹 앤 아이>로 데뷔하기 전까지, 정단영은 뮤지컬 배우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아예 못했다고 말했지만, 그 경험담을 들어보면 재능이 없었던 건 아닌 듯싶다. “<킹 앤 아이>에서 앙상블 대사 한마디가 팀 막내인 제게 주어진 거예요. 그 한마디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외우고 또 외웠는지 모르겠어요. 대사 한 줄을 엄청나게 연습하니까 선배들도 귀엽게 봐주시더라고요.” 두 번째 작품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는 공연 중 앙상블에서 주인공 페기 소여의 친구 필리스로 발탁되기도 했다. 순조로운 출발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했지만, 무용수에게 뮤지컬 무대가 만만한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신인 시절에 운이 좋았어요. 나중엔 오디션에 진짜 많이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노래가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춤은 혼자서라도 연습할 수 있는데, 노래는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모르겠고 막막하더라고요. 뮤지컬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적도 있어요.” 그녀가 확신 없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노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잘하는 건 못해도 열심히 하는 건 잘하거든요. 열심히 하면 언젠간 될 거다, 그런 믿음이 있어요. 만약 열심히 했는데도 안 되면, 더 열심히 해야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보상이 따른다는 정단영의 믿음이 통한 걸까. 주로 수준 높은 안무를 소화해야 하는 앙상블에 캐스팅됐던 그녀는, 2009년 <오페라의 유령>에서 발레 걸 맥 지리 역을 맡아 이듬해 더 뮤지컬 어워즈 신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올해엔 오랜 기다림 끝에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여주인공 페기 소여를 맡게 됐다. 대극장 공연에서 인지도가 부족한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파격적인 캐스팅이다. “어떤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연습실에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해서 집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죠. 하루 종일 작품 노래를 부르고 다녀서, 사람들이 멀리서도 ‘단영이 왔구나’ 하고 알았어요. 평소에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니니까 주위에서 짜증을 내더라고요. 창피하다고. (웃음) 그게 결코 좋은 거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안 그러면 불안해서요. 정말 엄청나게 연습을 했어요.” 극 중 역할 페기 소여가 무명 코러스걸에서 여주인공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드라마에 대한 감정이입의 힘일까. 정단영은 첫 주연작에서 캐릭터를 안정적으로 잘 표현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브로드웨이 42번가>가 배우에 대한 이야기다보니, 대사 하나하나가 정말 와 닿아요. 모든 대사가 진심으로 느껴지고, 또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요.”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선 정단영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녀의 대답은 예상외로 덤덤하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거나, 어떤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거나, 그런 욕심은 없어요.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게 열심히 하다보면 뭐든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대표작
2011년 <지킬 앤 하이드>
2010년 <오페라의 유령>
2008년 <시카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7호 2013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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