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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프리뷰] 러시아 발레의 신전으로 오세요 - 마린스키 발레단 내한 공연 [No.86]

글|김영주 | 사진제공|고양아람누리 2010-11-10 5,218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 스탈린과 KGB, 강제 이주,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겨울과 냉전,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같은 어둡고 차가운 거대한 제국의 이미지는 구소련 해체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저 속을 알 수 없는 나라에서 온 얼음 요정 같은 무용수들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흔들어놓는다.

 

 

발레를 발아시킨 것은 르네상스의 화원이었던 이탈리아의 궁정인들이었고, 이 새로운 춤을 공연 예술로 발전시킨 것은 프랑스의 절대군주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발레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러시아를 연상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발레 음악을 쓴 가장 위대한 작곡가들이 러시아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이고, 가장 혁신적인 안무가들이 러시아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하기도 했지만, 역시 결정적인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발레 무용수들이 가장 많은 나라가 러시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6년 만의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는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가 고국 러시아를 기억할 때 아름다운 것 하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든 공로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단체이다. 아직도 공산주의 시절의 키로프 발레단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지만, 애초에 알렉산데르 2세의 황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마린스키 발레단’이 공식 명칭이었다. 격변하는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이름을 잃었다가 되찾은 것이니 마린스키 발레단으로 기억하는 것이 예의일 듯싶다.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올가 스페시브체바의 전설적인 아름다움이나, 니진스키, 누레예프, 바리시니코프로 이어지는 무용사를 바꾼 발레리노들이 모두 마린스키 출신이라는 것 역시 경이롭기는 하지만 이 영광을 뒷받침할 현재가 없다면 쇠락을 강조하는 과거의 빛이 되고 말 것이다.
이번 내한 공연으로 한국을 찾는 마린스키의 수석 무용수 중에 단연 돋보이는 이름은 우리 시대 최고의 백조로 손꼽히는 울리아나 로파트키나다. 지난 십여 년간 변함없이 마린스키의 백조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그녀는 ‘가장 영적인 발레리나’로 칭송받는 깊이 있는 춤으로 유명하다. 출산과 부상으로 거의 2년간 무대를 떠나는 불운을 겪었지만 복귀 후에 예전보다 더욱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무용수로서나 인간으로서나 비범한 그녀의 내면 덕분이었을 것이다. 로파트키나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다닐 코르순체프는 남성적인 파워와 진중함, 우아함을 모두 갖춘 당쉐르 노블로 명성이 높다.
<백조의 호수>에서 이 베테랑 댄서들이 단연 기대를 모은다면, <지젤>에서는 마린스키의 차세대 신성들이 나란히 캐스팅되어 흥미를 더한다. 마린스키의 개성파 발레리나로 손꼽히는 빅토리아 테레슈키나와 클래식과 로맨틱 발레 양쪽에서 모두 선전하고 있는 알리나 소모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지젤을 보여줄 것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로 지난 몇 년간 마린스키 발레단 지도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소모바는 역시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쉬클리야로프와 호흡을 맞춘다. 테레슈키나의 파트너는 쉬클리야로프와 마찬가지로 순정 만화에서 빠져나온 듯한 미모와 로맨틱한 분위기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높은 안드리안 파데예프이다. 

이처럼 주역 중 누구 하나 설명을 빼놓을 수 없을만큼 쟁쟁한 스타들이 포진한 마린스키 발레단이지만, 이 단체가 특별한 것은 북극성처럼 빛나는 프린시펄 댄서들의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의 내공이야 단연 세계 최고이지만, 사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계 3대 발레단이니 세계 5대 발레단이니 지칭하는 국제적인 컴퍼니들이 자랑하는 간판스타들의 수준은 큰 차이가 없다.
무엇보다 오늘의 마린스키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과거의 신화나 현재 최고의 스타가 아니라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군무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력이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발레 댄서들이 제일 많은 나라가 러시아이고, 여기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 마린스키 부설 발레 아카데미인 바가노바 발레 학교인데, 이곳에서 수석으로 졸업을 한 학생조차 오디션을 힘겹게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마린스키 발레단이다. 군무의 제일 뒷줄에 서 있는 코르페 한 명까지도, 세계 최고의 발레 학교에서 1인자로 손꼽혔던 댄서라는 것이다.
가령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전경’ 장면에서 마린스키 발레단처럼 24명의 발레리나들이 하나가 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철저한 바가노바 시스템 안에서 턱 선이나 손끝의 움직임 하나까지 일치하도록 키워진 댄서들의 ‘순수한 완벽함’은 러시아가 자랑스러워하는 마린스키적인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월 9일부터 5일간 고양아람누리에서 이뤄지는 이번 마린스키 발레단의 내한 공연은 <백조의 호수>, <지젤> 그리고 갈라까지 세 가지 레퍼토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발레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백조의 호수>가 클래식 발레의 이데아를, <지젤>이 로맨틱 발레의 정수를 보여준다면, 마지막 갈라에 선보이게 될 조지 발란신과 제롬 로빈스의 신고전주의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발레의 현재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200년을 변함없이 사랑받은 고전부터 현대의 고전으로 추앙받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다른 시대적 배경과 차별화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는 이 작품들을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빛나는 무용수들의 춤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놓치기 아쉬운 기회이다. 또한 부산문화회관의 재개관 기념 공연으로 <백조의 호수>가 먼저 무대에 오르는 것은, 세계 정상급 예술가들의 내한 공연에 소외되어 있는 지역 관객들에게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11월 9일 ~ 14일 /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 031)960-9722
11월 5일 ~ 6일 /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 051)607-6057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86호 2010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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