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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프랑켄슈타인> 괴물의 탄생 [No.127]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충무아트홀 2014-05-07 5,563
생명 창조에 도전한 원작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W.셸리는 저주받은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괴기소설을 실낙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존 밀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입을 통해 읊은 그 시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중2 시절 우리 모두가 한번쯤 입에 담아봤을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로 치환될 것이다.

인용문이 암시하고 있듯이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애증 어린 복수극을 통해 그들의 지배 관계가 어떻게 역전될 수 있는지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괴담이다. 흔히 괴물의 이름으로 잘못 쓰이는 프랑케슈타인은 시체의 살과 뼈를 이어 붙여 저주받은 생명체를 창조해낸 과학자의 이름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이 청년은 인류를 위해 병들어 죽지 않는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지만, 막상 거대한 피조물이 눈 뜨는 순간 그 추한 모습에 혐오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달아나버린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런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는데, 작품 속에서 그저 괴물이라고 지칭될 뿐이었던 그 고독한 생명체가 긴 세월이 지난 후 아비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기이한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된 것은 원작보다 재창작된 대중문화 속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지면서 생긴 오해이지만 메리 셸리의 소설을 읽고 나면 굳이 정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필연적이고 그럴듯한 작명이다. 

메리 셸리의 원작에서 주인공은 성녀 같은 어머니가 병으로 요절한 것을 제외하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큰 충돌 없이 유복하게 성장했고 그의 삶에서 비극의 전조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킬 박사의 독선과 스위니 토드의 광기를 한 몸에 지닌 인물인 뮤지컬의 빅터가 애초에 편하게 살 팔자가 아닌 것으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원작의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인류를 위해 과학을 통한 생명 창조에 도전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감당하기 힘든 능력과 힘을 가진 피조물이고, 이 괴물이 추한 외양에 대한 보상처럼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 고귀한 것과 진실한 것을 갈망하는 예민한 성품과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선량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어도, 편견이 없을 것이라 기대했던 어린 아이에게 다가가도 번번이 끔찍한 결과로 돌아오는 경험을 반복한 끝에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진짜 괴물이 되어 자신의 창조주를 찾는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천형 같은 고독을 끝낼 수 있도록 반려를 창조해달라고 애원하지만 그 이성의 괴물을 통해 끔찍한 후손들이 탄생할 것을 우려한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의 청을 거절한다. 분노한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여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만든다. 세상에서 유리된 고독한 창조주와 피조물은 서로에 대한 복수심만 남은 상태로 북극까지 쫓고 쫓기는 마지막 추격을 한다. 



대극장 창작뮤지컬의 고질적인 문제 극복

그렇다면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이 저주받은 숙명이 뮤지컬만이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왕용범 연출의 전작들이 그렇듯이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역시 원작에서 가능한 멀리 달아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중들이 원작 소설이 아니라 재창작된 대중문화 속 이미지를 통해 프랑켄슈타인을 기억하고 소비하듯이 뮤지컬 역시 현대의 관객들이 흥미로워하는 부분들을 무대에 재현하는 데 집중한다. 

핵심 사건을 제외하면 극적 내러티브와 디테일은 물론이고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관계까지 완전히 재창조되었다. 신체를 재생해서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다는 설정이나 저주받은 피조물의 만행과 고행을 다루는 방식은 SF물이라기보다는 『백작 카인』 시리즈 유의 일본 만화에 가까워 보인다. 뮤지컬은 고어하고 탐미적이면서 사도 마조히즘적인 요소들로 만화적인 감성을 포화 상태까지 채운다. 배우들이 고음역대에서 감정을 분출하며 클라이맥스를 반복해야 하는 음악은 극이 목표한 바에 다다르기 위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신을 믿어 지독하게. 만약 신이 없다면 누가 이 세상을 이런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대사에서 드러나는 빅터의 세계관은 원작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자신의 창조주를 증오하고 원망하며 생명을 창조해낸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똑같은 책망을 받게 되는 기구한 비극은 극 중에서 좀 더 부각되어도 좋았을 것이다. 

또한 1막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너의 꿈 속에서’는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기 위해 죄수와 몸을 바꿔 단두대를 선택한 연인이 부르는 이중창 ‘우리의 죽음은 사랑의 승리(La nostra morte e il trionfo dell'amor)’를 연상시키는 비장미 넘치는 곡이지만 2막에 이르러 그 드라마틱한 희생은 극적 갈등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눈을 뜨자마자 죄 없는 집사 룽게를 살해하는 것으로 포악함을 드러냈던 괴물이 카트린느는 왜 구해주는지, 빅터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점은 기억하고 원망하면서 그 직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는 어째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의아한 가운데 휘몰아치듯 극이 진행되면 1막에서 가장 강렬했던 드라마-친구의 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앙리의 절규-는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지는 것이다. 



괴물이 원래는 프랑켄슈타인의 친구이자 동조자였다는 설정은 어느 순간부터 빅터도 잊고 앙리도 잊고 연출가도 잊은 게 아닌가 싶다. 앙리가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선택을 한 결과 현재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죽음과 재생의 충격 때문이었다고 치자. 그래도 빅터가 그에 대해 품는 감정이 아무런 연고 없는 시체를 재생했던 ‘괴물’을 대면하는 원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재창작 과정에서 추가된 흥미로운 설정을 작품 안에서 충실하게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비주얼적인 요소들이다. 인상적인 인트로를 비롯한 영상의 활용과 무대미술은 극의 완성도에 한몫을 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대단원을 장식하는 북극의 묘사다. 느닷없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북극이라는 공간을 세상 끝의 절대 고독을 상징할 만한 강렬하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묘사하여 관객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면 창작뮤지컬 역사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감당하지 못하던 대극장 창작 뮤지컬의 고질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라이선스 뮤지컬의 성공 요소들을 충실히 벤치마킹했기 때문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브로드웨이 히트작의 공식을 따랐다기보다는 한국에서 유난히 큰 성공을 거둔 해외 뮤지컬들의 공통점, 그리고 라이선스 뮤지컬을 한국화할 때의 노하우가 충실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한국 관객을 위한 맞춤형 대극장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 그 이후의 뮤지컬계가 궁금해지는 것은 관객들이 뮤지컬에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답안처럼 공개해놓은 이 작품 이후 이러한 방식이 창작뮤지컬 제작의 새로운 길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7호 2014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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