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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TAFF] <이른 봄 늦은 겨울> 연출가 임도완 [No.138]

글 | 안세영 사진 | 배임석 2015-04-05 6,193

새로운 실험, 색다른 몸짓 

지금까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왔던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하지만 신작 <이른 봄 늦은 겨울>은 다르다. 특정한 주인공도 줄거리도 없다.  다만 눈 속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 ‘매화’를 소재로 다양한 에피소드를 펼쳐놓는다. 

이 새로운 실험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다양한 신체극을  선보여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대표 임도완 연출. 
공연을 앞두고 만난 그는  ‘이번엔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작품에 대해 묻기 앞서, 이전의 가무극과 차별화된 공연을 시도하는 서울예술단의 목표가 궁금하다.
정혜진 예술감독은 새로운 실험을 통해 서울예술단 가무극만의 정체성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서울예술단이 보여준 가무극은 가(歌)와 무(舞)로 스토리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형식상 뮤지컬과 유사했다. 여타 뮤지컬과 다른 점은 무용 장면만 떨어뜨려 놓아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는 형식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른 봄 늦은 겨울>은 처음부터 서울예술단의 강점인 무용과 움직임에 중점을 두고 기획됐다. 마임과 이미지극을 주로 해온 내가 연출을 맡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막연한 컨셉만 가지고 출발해서 배삼식 작가, 김철환 작곡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옛 이야기나 시를 움직임과 노래로 표현해보자는 것으로 구체적인 방향을 조정했다.


<이른 봄 늦은 겨울>의 핵심 소재는 매화다. 동양에서 매화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인데,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선택한 것인가?
그런 상징성을 내세우고 싶진 않았다. 매화는 한중일 공통의 인문학적 기반에서 찾아낸 소재일 뿐이다. 호랑이, 대나무 등 여러 후보가 있었는데 매화가 그중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소재라서 선택했다. 매화 자체를 강조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제목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극 중에 나오지만 옛 선비들 사이에는 이른 봄에 처음 피어난 매화를 찾아 산 속으로 떠나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탐매(探梅)’라고 한다. 관객들도 탐매하듯 고즈넉한 마음으로 공연을 보러오면 좋겠다. 굳이 내가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무대 위의 이미지와 대사가 관객이 살아온 삶과 맞닿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매화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든 그건 관객 각자의 몫이지만, 복잡하고 아픈 세상에서 잠시나마 위안과 즐거움을 얻어갔으면 한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텍스트로 가득한 대본을 보면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가 예상되는데.
대화체가 아니기 때문에 언뜻 무거워 보이지만 유머러스한 부분도 많다. 그 유머러스함을 최대한 살려 연출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루할 것 같은 다도 장면에서 세 명의 배우 중 한 명만 계속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런 장면이 일상 속 우리의 실수를 연상시키며 소소한 웃음을 줄 수 있다. 음악도 전반적으로 경쾌하게 흘러갈 것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경쾌한 음악과 상반된 이미지를 함께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작곡가에게는 르네 오브리의 음악을 들려주며 그렇게 만들어달라고 얘기했다.


특정 시대나 공간이 아닌 환상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장면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기도 하는데 무대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작품이 시작되는 장소가 갤러리다. 갤러리의 흰 벽에 매화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데, 불이 꺼지면 그 벽체를 배우들이 직접 움직이면서 공간이 바뀐다. 그러면서 그림 속의 이야기가 하나씩 펼쳐지는 것이다. 마치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 (웃음) 정해진 몇 장면에만 무대에 서고 다른 배우가 노래하는 동안 무대 뒤에서 다음 장면을 준비하던 방식과는 다르다. 열다섯 명의 배우가 공연 내내 연기와 춤, 무대 운용까지 책임져야 하는 만큼 에너지도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배우들의 체력 조건을 고려해 주말에도 이례적으로 한 번만 공연하는 것이다.

핵심 소재인 매화는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되나. 서울예술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영상이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활용되나?
무대미술에서의 새로운 영상 활용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기존 뮤지컬에서의 영상이 주로 배경을 대신하는 용도였다면, <이른 봄 늦은 겨울>의 영상은 장면에 대한 추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만개한 매화를 보여주는 등의 직접적인 이미지는 자제하려 한다. 정재진 영상 감독에게 얘기하니 팝아트냐고 묻더라. 맞다, 팝아트처럼 보일 수도 있다. 또 영상이 무대 전면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적재적소에만 사용될 것이다. 무대에 막을 내려뜨리고 그 위에 비디오 프로젝터를 쏘는 대신 영상이 덧입혀질 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할 것이다.




서울예술단 가무극의 안무는 한국 무용과 군무가 중심이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새로운 안무를 볼 수 있나?
군무는 있지만 무용의 느낌을 덜어내고 구체적이면서 연극적인 움직임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무용단원들은 이 작업에 어려움을 느낀다. 무용의 움직임을 일상의 움직임으로 바꾸고, 다시 그것을 무대 언어에 맞게 바꿔야 하니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움직임의 동기다. 만약 어딘가를 찾아가는 장면이라면 무슨 이유로 찾아가나, 찾아가면서 무엇을 보나, 어떤 장애물을 만나나가 명확해야 관객들도 그 움직임에서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우 스스로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한다. 막연하게 기분으로 움직이는 건 ‘공짜 움직임’이다. 무용과 연극이 다른 지점이 여기인 것 같다. 춤에서는 ‘아름답게’ 가는 것이 중요하지 ‘왜’ 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턴을 하면서 정확하게 파트너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 파트너를 들어 올렸다 내려놓는 테크닉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도 일상의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받은 인상을 무용을 통해 재구현하지 않았나. 일상의 움직임도 무대 위에서 얼마든지 극적인 움직임으로 바뀔 수 있고, 그 자체로 재미를 줄 수 있다. 


대본 자체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연출과 연기 면에서 많은 부분이 열려있다. 작업 과정에서 배우들의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배우들도 처음엔 당혹했을 것이다. 이런 대본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특별히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역할도 없기 때문에 배역을 정해놓지 않은 채 연습에 들어갔다. 그리고 배우들에게 노래로든 움직임으로든 자기 나름대로 대본 속 장면을 해석해오도록 시켰다. 사실 일반적인 대본보다 직접 뭔가를 만들어낼 여지가 많은 이런 대본으로 작업하는 것이 훨씬 재밌다. 한 배우는 대본에 맞춰 반주와 랩을 만들어왔는데, 들어보니 아주 좋아서 작곡가한테도 들려주고 비슷하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단원들도 공동창작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
그래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살아서 움직인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의 에너지가 없고 연출가의 디렉션만 기다리는 꼭두각시가 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단들의 경우도 다 팀 작업을 한다. 그냥 잘난 연출가 밑에 배우들을 모아둔 게 아니란 얘기다. 서울예술단 단원들 역시 그동안 함께하며 쌓아온 팀워크가 있기 때문에 각자의 색을 집어넣으면서도 수월하게 손발을 맞출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공연은 객원 배우 없이 순수하게 15명의 젊은 단원들이 모여 만들어낸 무대란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매화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차용한 것과 달리 음악, 무대, 안무 등의 공연 양식은 매우 현대적이다. 서울예술단은 기획 단계부터 작품의 해외 진출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오히려 다른 작품에서보다 전통적인 한국미를 내세우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보이첵>, <휴먼 코메디> 등 앞서 해외에서 인정받은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신체극도 전통적 요소 없이 세계인의 보편 감성에 호소한 작품이던데.
작품이 잘 만들어져 외국에 나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처음부터 외국에 나가려는 목적으로 작품을 만든 적은 없다. 특히 외국인의 눈에 생경하고 신기한 것을 보여주고 오리엔탈리즘을 팔아먹는 것은 절대 싫다. 물론 외국에서 공연을 올리려면 자기만의 정체성을 보여줘야 하지만, 그 정체성이 반드시 우리나라 전통에서 나온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장 우리가 입고 먹는 것부터가 한국적 전통과는 다르지 않나.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얘기를 곧잘 하는데 난 거꾸로 얘기하고 싶다. 다른 나라 것도 세계적인 거라고. 물론 전통을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물결을 타고 나가야 한다.

일관된 줄거리나 주제 없이 이미지 표현에 중점을 뒀다는 점에서 상업예술보다는 순수예술에 가까운 극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미술 작품을 보면서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작품이 주는 느낌에 집중한다. 그런데 무대 공연을 보면서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기승전결로 모든 걸 설명해주길 바란다. 현재 대학로의 많은 연극들이 보여주는 문제이기도 하다. 카메라 여러 대로 촬영해서 영상으로 만들면 훨씬 잘 만들 수 있는 것을 연극으로 만들어 올린다. 하지만 무대 위에 현실의 단면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미디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그래서 극장을 통해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재미있었던 시절에나 통한 방식이다. 다큐멘터리, 리얼 버라이어티 등을 통해 실제 삶이 중계되기도 하는 지금 같은 시대에 왜 연극까지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가. 대사로 세트로 음악으로 모든 걸 설명하는 연극은 좋은 연극이 아니다. 무대는 무대만의 압축된 언어로 관객과 소통해야 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8호 2015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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