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와 바둑, 그리고 알까기 뮤지컬
바둑과 알까기
인프라의 보급에 비해 콘텐츠의 확산이 더딘 게임을 꼽자면 바둑이 으뜸일 거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집집마다 이런저런 모양의 바둑판 하나쯤은 갖고 있었는데, 재밌게도 정작 바둑을 둘 줄 아는 애들은 별로 없었더랬다. 보통 가정집에서 바둑알의 가장 큰 용도는 윷놀이의 말이거나 ‘홀짝’ 내기 정도 아니었나? 정식으로 바둑을 둔다는 건 외려 생경한 일이었다. 바둑의 전략을 구사하는 재미는 학습과 훈련이 반복될 때만 얻을 수 있는 쾌락이니, 인내심 없는 어린 궁둥이가 배울 수 있는 놀이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도 바둑판이 낯설지 않은 건 놀랍도록 단순한 응용 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돌 흰 돌이 서로 엉켜 집을 짓기 위해 싸우는 전략의 대결이 아니라 검은색 흰색 딱 나눠서 하나씩 밀어내는 몸뚱이의 싸움, 이름하야 알까기.
똑같은 바둑판과 바둑알을 쓰건만 바둑의 세계와 알까기의 세계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이다. 그 차이는 무엇보다 바둑판 위의 그림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알까기는 상대방의 돌을 밀어내야 이기는 게임이니만큼 이기든 지든 바둑판 위는 휑해지게 마련이다. 마지막 남은 돌의 색깔이 무엇인지, 알까기의 관심은 오직 결과에만 쏠려 있다. 하지만 바둑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게임이 끝나도 바둑판을 가득 채운 돌들을 치우지 않는다. 바둑판 위에 놓인 모든 돌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다음의 승부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임은 끝났어도 복기(復棋)의 과정을 지루하리만치 진지하게 거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바둑에서 패배란 다음의 승리를 위한 포석인 셈이다. 알까기의 텅 빈 승리와 바둑의 꽉 찬 패배. 흑백의 돌만큼이나 명확한 대비를 이루는 바둑판 위의 풍경이다.
<체스>의 알까기
체스 이야기를 하려다가 바둑 장광설을 늘어놓은 건 체스의 룰을 잘 모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둑과 체스. 인간의 창의성을 증명할 동서양의 대표적인 두뇌 게임 아니던가. <체스>, 이런 제목이라면 작품의 주제와 형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보를 사전에 던지고 있다고 봐도 좋을 거다. 체스 게임은 사람살이를 비유하는 하나의 장치일 테고, 체스의 이미지는 그대로 무대그림의 소재가 될 것이다. 바둑의 세계만큼 정교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대결이 펼쳐지리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 뮤지컬 <체스>는 겉보기에 바둑을 연상시키지만 실상은 알까기에 가깝다. 작품의 기본적인 포석은 적잖이 드라마틱하건만(냉전 시대라는 선명한 이분법의 세계 위에서 전쟁과도 같은 체스 경기를 펼쳐야 한다! 그 사이에서 싹트는 체제를 뛰어넘는 불가능한 사랑, 그걸 지키기 위한 불가능한 선택!), 치밀한 논리로 만들어지는 서사의 집짓기는 여기에 없다. 이 공연에 적응하려면 과정 하나 없이 오로지 결과만 있는 단순한 병렬적 구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도대체 왜 게임을 지연시키는지, 왜 사랑에 빠지는지, 왜 망명에 오르는지, 왜 헤어지는 건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넘어가도록 하자. 냉전 체제니까 갈등해야 하고, 반대편의 남녀니까 사랑에 빠져야 하고, 사랑은 체제보다 숭고하니까 희생해야 하는 거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결과 아니겠나. 이야기를 엮는 솜씨가 영 부실하지만 비단 이 작품만의 문제는 아니니 새삼 정색하지는 말자.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이 작품이 선택한 공연으로서의 화술이다. 이 공연의 흐름은 전체적으로 느리게 처져서 꽤나 지루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극적 전개를 이끄는 무게중심이 사건이 아니라 대사에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의 대사에는 노래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 작품의 음악은 거의 독백을 연상시킨다. 이전의 사건에서 아무것도 구축된 바 없지만 노래의 설명으로 모든 걸 눙치고 넘어가는 식이다. 모든 노래가 어쩜 이렇게 설명적이고 고백적일까. 노래만 나오면 그나마 이어지던 극의 흐름도 딱 멈춰버린다. 여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복선도 그렇고, 망명의 이유가 그려지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마지막 장면. 아예 한마디로 주제를 던져주더라. ‘우리 모두는 체스 판의 말에 불과하지.’ 으악. 뜬금없으면서도 구태의연하다. 이건 극작의 기술에서 피해야 할 최악의 패착이며 주제에 대한 조급함이 만들어낸 조악한 마무리이다. 원작의 한계가 있다 해도 다시 매만져서 완성도를 높이는 게 창작진의 역량이겠지만 이 공연에서 크게 기대할 수는 없어 보인다.
공간을 연출하는 화술에서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체스 경기의 현장감을 무대그림이 아닌 오로지 대사로 설명하는 것을(삼 대 일! 사 대 일! 동점!) 상상력의 부재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무성의로 받아들여야 할까. 오래전 오태석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캐퓰릿과 몬태규의 대립을 체스 게임처럼 공간 위에 연출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노련하고 뛰어난 표현이었는지 <체스>를 보면서 알겠더라. 이 공연은 체스의 이미지를 시각적인 언어로 활용하는 데 어떠한 상상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마지막 즈음에 앙상블들이 체스 말을 들고 분주하게 오가며 체스 경기를 묘사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쩌나. 기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니 말이다. 체스 말 중 ‘룩’을 연상시키는 성채를 세워 무대를 둘러쌌지만 작품의 규모에 비해 너무나도 큰 세종문화회관의 공간은 아무리 메워도 ‘빈 공간’처럼 보일 뿐이다. 등퇴장을 하려 해도 한참을 걸어 나가야 하는 이 큰 공간을 세트 대신 영상으로, 앙상블보다 한두 명의 배우로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함인지 아님 무심함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웅장한 규모의 극장에서 거창한 주제를 담은 아름다운 음악의 공연을 본다 했지만 볼수록 기대와는 영 다른 모양새다. 용두사미. 조훈현의 대국인 줄 알았는데 최양락의 알까기를 보게 된 기분이다.
알까기의 돌로는 바둑을 둘 수 없다
<체스>가 총체적 난국이 된 까닭은 뭘까?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와 조율되지 못한 연기 톤에 책임을 미루긴 아직 이르다. 이런 건 공연을 해 나가면서 어쩌면 개선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구조적인 데 있다. 이 작품에서 연출가 왕용범은 이야기의 구축과 장면의 상상력에 한계를 내보인다. 앞서 언급한 서사의 허술함과 공간 연출의 빈곤함뿐 아니라 의미심장하게 설정된 장면마저도 극 전체의 일관성에 녹여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례로 첫 장면 헝가리 침공 영상이 깔리는 가운데 아버지와 딸이 체스를 놓는 장면은, 연출의 의욕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극의 흐름에 달라붙지 않는 완전한 사족에 불과하다. 왕용범의 관심은 체스보다는 역사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지해지려면 역설적으로 체스 게임의 긴장과 재미가 이야기와 장면으로 살아나야 함을 기억해야 할 터. 이야기는 허술했어도 대중에게 흥행으로 인정받았던 왕용범 특유의 역동성을 이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작품에서 왕용범은 여러모로 어정쩡하다.
하지만 어정쩡한 게 어디 연출뿐이겠는가. 엠뮤지컬 컴퍼니는 이 작품에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네 명의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다분히 마케팅을 염두에 둔 포석이겠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니, 아이돌을 캐스팅했으면 적어도 그 팬들에게 자기의 스타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재미와 품위를 경험케 하는 게 맞다. 뮤지컬이라는 틀 안에서 배우로 만들어지는 스타를 지켜보는 순간 관객은 팬덤의 정체성을 넘어서게 되니 말이다. 아이돌을 기용한 작품일수록 완성도를 고민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관심은 어디에 있나? 흥행이라는 결과를 작품의 완성도보다 우위에 놓을 때 작품은 다음을 위해 복기할 수 있는 바둑이 아니라 판 위의 모든 돌을 밀어내는 알까기에 불과할 뿐이다.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은 바둑돌 몇 개로 알까기를 할 수 있지만, 나중에 그 몇 개 안 되는 돌로는 바둑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바둑 둘 생각 없다고? 그럼 말고. 단 지금처럼 하면 알까기의 재미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2호 2015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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