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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ESSAY] <어쩌면 해피엔딩> 에세이 [No.144]

글 | 박천휴(작가) 사진 | 박천휴(작가) 2015-10-08 6,011

작고 조곤조곤한 뮤지컬,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01    음, 부끄럽지만… 작정하고 찍은 저희 프로필 사진…

그는 커다란 도시 속 
낡은 아파트에서 익명으로 살아간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밤의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트럼본을 연주한다.
그는 유일한 친구인 제임스를 꼭 다시 만나길 바란다.
그는 로봇이다.

저와 제 창작 동업자 윌 애런슨이 함께 쓴 신작 <어쩌면 해피엔딩>의 작업기를 써달라는 요청에 저희가 이 작품을 막 구상하기 시작할 때 주고받은 이메일을 들춰봤습니다. ‘새 공연 아이디어’라는 제목의 작년 4월 11일자 이메일에는 저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후 약 1년 반에 가까운 동안 대본과 음악을 완성하는 사이 인물의 이름도(이제 주인공은 ‘올리버’란 이름을 갖고 있지요), 성격도 꽤나 달라졌지만, ‘사람과 몹시 흡사하게 생긴,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로봇’이란 커다란 설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올리버는 트럼본을 불진 않지만, 재즈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점도 캐릭터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고요. 



02    지난 7월에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진행한 1차 내부 리딩입니다.  피디님이 내부 관계자만 모인 테이블 리딩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서울로 오라고 했는데, 스트링 쿼텟을 포함한 풀 밴드와 마이크까지 착용하고 무대에서 리딩을 했죠.  심지어 테크 리허설도 있었다는. 아니 무슨 테이블 리딩인데 테크 리허설을 해! 물론 외부 관객들도 오심.


몇 해 전, 저와 윌이 함께 작업한 첫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노래들이 저희의 순진했던 기대보다 더 따뜻한 관심을 받는 일이 벌어졌고, 그건 저희에게 무척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관객분들의 격려 덕분에 다음 공연을 하나 더 쓸 정도의 힘을 얻었거든요. 공연을 통해 얻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현장에서 긴박하게 이루어지는 공동 작업의 경험은 창작에도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다음 작품을 쓴다면, 조금은 흥미로운 무언가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이브한 생각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치기 어린 생각일지라도, 다른 무엇보다 저희에게 와 닿는 이야기로 우리 감정에 솔직한 창작뮤지컬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간절해졌지요. 일단 한 번 목이 마르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을 정도의 갈증을 느꼈습니다. 
서울에서 <번지점프를 하다>의 재공연을 끝내고 막 뉴욕에 돌아온 무렵, 저희는 서너 개의 이야기를 조금씩 구체화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트리트먼트가 나왔을 정도로 꽤 진행된 상태였고요. 그러다 작년 봄 윌과 함께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에 앉아 있는데(근 7년째 브루클린에서 고작 세 블록 떨어져 사는 저와 윌은 지겨울 정도로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브릿팝 밴드 블러의 프론트맨인 데이먼 알반이 새로 발표한 노래 ‘Everyday Robots’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죠. 

우린 에브리데이 로봇,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 있는…

그 순간 문득, ‘사람과 똑같이 생긴 로봇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결국 ‘사람 같은 외모에 감정까지 갖춘 로봇들이 고물이 되어 버려진 채 저마다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장면에 다다랐죠. 이 아이디어를 잊지 않으려고 서로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 이메일은 그 후 무수히 많은 이메일의 시작이 됐습니다. 



03    제가 윌의 작업실에 붙여 놓은 격언


봄이 가고, 유난히 선선했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윌과 저는 ‘헬퍼봇(Helperbot)이라 불리는, 인간을 보조하는 역할로 개발된, 인간의 외모와 감정을 지닌 1세대 로봇들이, 세월이 흘러 고물이 되었고, 그들이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에 저마다 버려진 채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를 완성했어요. 너무나 많은 가능성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이야기는, 본격 판타지 액션 어드벤처로 나아갈 뻔하다 간결해짐을 거듭해 가을 무렵엔 ‘고물이 되어 버려진 채 외롭게 살아가는 두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현재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04    초고를 완성하고, 제본까지 마쳤을 때의 뿌듯함이란!


저와 윌은 협업하는 사이가 되기 이전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이야기를 구상할 때 맞장구를 잘 치는 편입니다.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격려 혹은 효율적인 지적을 해줄 수 있는지 잘 알뿐더러,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막 던지는 아이디어조차 서로 좋아할 가능성이 크죠. 그런 면에서는 매우 훌륭한 창작 파트너입니다만, 각자 다른 문화권에서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을 보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미세하게 결이 다른 감수성을 지닌 걸 느끼기도 합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시작이 된 로봇 이야기는 지금까지 구상했던 이야기 중 둘 모두에게 ‘보편적’인 정서가 있었어요. 맹목적인 비극도, 감당 안 되는 희극도 아닌, 뭐랄까, 솔직한 멜랑콜리와 담백한 연애관 같은 걸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미래’와 ‘로봇’이라는 설정상 자연스레 판타지 액션 어드벤처…로 흘러갈 뻔했던 이야기는, 저희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점 간결해져서 ‘우리는 왜 사랑이라는 걸 하는 걸까’라고 질문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올리버와 클레어는 다 망가져 가는 고물이 되어서야 그 감정을 배우게 되고, 그건 이 둘에게 사랑과 삶의 의미를 묻게 합니다. 사랑하니까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사랑은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이즈음 이 작품의 워킹 타이틀은 ‘우린 왜 사랑했을까’였어요. 그렇게 저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점점 명확해졌습니다. 



05    평일엔 출근을 해서 아무래도 주말은 폭풍 작업을 하게 되죠. 이른 봄, 어느 볕 좋은 일요일에 제 부엌에서 함께 작업하다가.


일곱 페이지의 트리트먼트는 우란문화재단의 김유철 프로듀서에게 전해졌습니다. 김유철 프로듀서는 저희의 작업에 늘 관심을 보였는데(뭘 믿고 그러시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프로듀서는 도박사 같은 배포가 있어야 하니까요) 감사하게도 이번 작품의 리딩과 트라이아웃 공연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고, 특히나 이 공연을 영어로 개발하는 것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인과 미국인 창작 듀오로서 저희의 공연을 뉴욕에 올리고 싶은 꿈이 있기도 했고, 앞에서 말했듯이 보편적인 감수성을 지닌 이 이야기가 꼼꼼한 개발 단계를 거쳐 뉴욕 무대에도 선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저희에겐 너무나도 감사한 제안이었죠. 작업 초반 약 일 년 동안은 한글 대본과 음악 완성, 서울에서의 내부 리딩과 트라이아웃 공연까지 일정을 잡고 구체적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06    작년 가을, 윌의 부모님 집(뉴욕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 숲 속에 있음)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합숙 훈련을 할 때. 대본을 함께 집필하니까 우선 초고는 거칠더라도 영어로 씁니다. 그리고 제가 한글로 옮기지요.


저와 윌의 아이팟엔 ‘올리버와 클레어’라는 이름의 플레이리스트가 있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을 쓰는 동안 영감을 준 음악을 공유하는 플레이리스트죠. 빌 에반스의 ‘Here’s That Rainy Day’, 빌리 할리데이가 부른 ‘What’s New’ 같은, 주인공 올리버가 즐겨 들을 법한 오래된 재즈곡부터, 영화 <비기너스>의 테마 음악, 더스틴 오할로렌의 피아노 소품처럼, 공연의 감수성과 비슷한 결을 가진 음악들이 이 플레이리스트에 있습니다. 물론, 첫 번째로 영감을 준 데이먼 알반의 노래도 리스트에 올라가 있고요. 지난 6월에 <어쩌면 해피엔딩>의 초고를 완성하고 한동안 듣지 않았던 이 플레이리스트를 오랜만에 들으면서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창작자로서 <어쩌면 해피엔딩>의 시작은 조금 이기적이었습니다. 제가 듣고 싶은 음악과 느끼고 싶은 감정이 가득한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게 시작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고작 몇 주 후면 관객분들이 극장을 찾아와 (우선은 트라이아웃 형식의 공연이지만) 두 시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집중하며 이 이기심의 결과물을 보실 걸 상상하니, 심란할 정도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해집니다. 그렇지만, 두려움과 설렘이 거의 정확하게 반반의 비율로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렘은, 어쩌면 저희의 이야기와 음악에 공감할 관객분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겠죠. 저는 <어쩌면 해피엔딩>의 현실에서의 엔딩이 앞으로 어떻게 되든 제 삼십 대 첫 몇 해의 감정들을, 민낯 같은 솔직함으로 이 작품에 담았기에 기분이 좋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저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요? 그리고 관객분들에겐 어떤 의미가 될까요. 이 작고 조곤조곤한 창작뮤지컬이 자라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일 것 같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4호 2015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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