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발걸음
탭댄스에 빠진 북한군 소년 포로 ‘로기수’가 돌아왔다. 소년의 탄생을 함께했던 배우 윤나무도 돌아왔다. 초연에 이어 재연에 임하는 그의 각오는 무엇일까?
아직 나도 모르는 내가 많다
작년 말부터 출연해 온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이 지난 2월 막을 내렸어요. 이 작품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했다면서요?
네, 피터슨 목사 역을 맡은 배우가 저희 아버지세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연극 배우셨는데 나이가 드신 뒤로 무대에 설 기회가 없으셨거든요. 그런데 2014년, 제 공연을 보러 오신 아버지를 보고 김태형 연출님과 지이선 작가님께서 공연 출연을 제안해주셨어요. 그게 <내일도 공연할 수 있을까?>라는 공연이었는데, 그때 두 분이 기회를 주신 덕분에 이후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된 거죠. 무척 감사하게 생각해요.
나무 씨가 배우를 꿈꾸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인가요?
솔직히 어렸을 땐 연기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는 연극배우에 대한 처우가 지금보다 더 열악해서 생활고로 어머니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거든요. 고된 직업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러다가 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셔서 5년 정도 공연을 쉬셨어요. 나중에 다시 무대에 오르셨을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도 보러 갔는데, 아버지를 포함해 그 공연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정말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를 바꿔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선언했어요. 아버지는 반대하셨죠. 지원도 전혀 못 받았어요. 그래도 제 힘으로 연극영화과에 합격한 다음부터는 아버지도 인정해 주시더라고요.
아버지와 한 무대 섰을 때 감회가 새로웠겠어요.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연습실로 출근한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죠. 사실 그 당시에는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그게 특별한 건지도 모르고 넘어간 것 같아요. 그런데 마지막 공연 커튼콜 때 아버지가 굉장히 뭉클한 눈빛으로 절 쳐다보시더니 꼭 껴안아 주시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지금은 연극 <올모스트 메인>과 뮤지컬 <로기수>에 동시에 출연 중이에요. <올모스트 메인>에 출연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죠?
2년 전에 짧게 출연했었죠. 이 작품은 아홉 가지 사랑 이야기를 묶은 옴니버스 연극인데, 그중 ‘They Fell’이란 에피소드 하나를 (박)성훈 형과 연기했어요. 그때 극단 ‘간다’ 사람들과 처음 만났는데 정말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계속 같이 공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이후 <우리 노래방 가서 얘기 좀 할까>라는 공연도 참여하게 됐죠.
‘간다’와 작업할 때 좋은 점이 뭔가요?
‘간다’ 공연을 보면 배우들이 연기를 참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연출인 (민)준호 형이랑 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되게 치열해요. 무대 위에 있을 때 1초라도 거짓된 표정이나 호흡이 섞이면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세요. 발가벗은 채 연기하는 기분이죠. 종종 ‘간다’ 공연을 다시 하고 싶어지는 건 준호 형의 그 따끔한 한마디가 그리워서예요.
채찍질을 자처한 거군요.
계속 저 스스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작품을 골라요. 데뷔하고 5년 동안 많은 작품을 해왔는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관객분들도 이제 나한테 질리지 않을까? 그냥 대학로에 가면 늘 보이는 식상한 배우가 되면 어쩌지?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내 안에 아직 나도 모르는 내가 많이 있다고 믿고, 그걸 끄집어낼 수 있는 작품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올모스트 메인>은 네 개의 에피소드에 각각 다른 성격의 인물로 등장할 수 있는 작품이라 좋았죠. <로기수>는 몸치로 유명했던 제가 탭댄스에 도전한 작품이고요. 재연에 참여한 것도 좀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였어요.
누구든지 꿈꿀 수 있다
<로기수> 재연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제는 탭댄스에 익숙해진 만큼 드라마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얼핏 보면 탭댄스라는 화려한 춤이나 거제포로수용소라는 특이한 공간이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제가 <로기수>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굉장히 드라마틱하다는 거였어요. 저렇게 총탄이 빗발치고 포로로 잡혀온 수용소에서조차 누군가는 꿈을 꾼다. 누구든지 꿈을 꿀 수 있고, 꿈을 이룰 수도 있고, 그건 나의 의지에 달렸다. 이런 메시지의 작품이잖아요. 이 메시지를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어요.
<로기수>에서 특히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요?
기수가 탭댄스를 추는 1막 마지막 장면이요. 같이 출연하는 (김)민건 형은 그 노래 반주만 나와도 소대에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제 연기를 돌아보게 됐어요. 그 전까지 저는 그 장면에서 플라잉이 잘될까, 노래가 틀리지 않을까에만 너무 신경 썼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 기수라면 어떤 기분일까요? 말로 표현을 못할 정도니까 노래까지 나오는 거잖아요. 이건 뭐지? 전쟁터에서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진짜 재밌다! 그런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어요. 결국 이 감정이 발단이 돼서 춤에 목숨까지 걸게 되는 거니까요.
초연 때는 이 장면에서 플라잉 로봇을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와이어 액션으로 바뀌었어요.
저는 초연 때의 로봇도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지인이 보고는 인형 뽑기 같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노래 중간에 누군가 제게 벨트를 채워줘야 하는 작업도 번거로웠어요. (김)대현 형은 벨트를 제때 못 채워서 그냥 바닥에 서서 노래한 적도 있어요. 제작사에서도 기술적으로 아쉬움을 느꼈나 봐요. 이번에는 최대한 간편하면서도 관객들의 환상을 깨지 않는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아요. 아무쪼록 심장이 뛰어서 날아갈 것만 같은 기수의 심정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면 좋겠어요
김태형 연출과는 <로기수> 외에도 많은 작품을 함께했죠?
그랬죠. <모범생들>, <히스토리 보이즈>, <아가사>, <카포네 트릴로지>,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까지. 연출님이 제가 없는 어떤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서 ‘이제 세고 싶지도 않다’고 하셨대요. (웃음) 여러 작품을 함께하긴 했지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이전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그러니까 계속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만날 한 걸 또 하면 연출님도 재미가 없으셨을 거 아니에요. 나한테도 아직 새로운 게 있다, 더 다양한 게 있다는 걸 관객분들께 보여드리기에 앞서 연출님께 먼저 보여드린다는 생각으로 연습해요.
뮤지컬에서는 계속 창작 작품만 해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드라마가 뚜렷하고 음악이 드라마에 잘 어우러지는 뮤지컬을 선호해요. 그래서 계속 창작 뮤지컬을 선택해 온 것 같아요. 라이선스 뮤지컬은 번역된 가사와 음악이 잘 맞지 않거나, 작품의 정서가 국내 정서와 동떨어지기 십상이잖아요. 결국 우리나라 관객에게 가장 공감있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창작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정말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라이선스든 창작이든 가리지 않고 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윤나무의 꿈의 뮤지컬은?
나이가 들면 <맨 오브 라만차>의 세르반테스를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되려면 큰 극장을 채울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열심히 해서 그런 배우가 되면 좋겠어요. 로기수에서 세르반테스로, 포로수용소의 꿈꾸는 탭 댄서에서 지하 감옥의 꿈꾸는 이야기꾼으로. 그럴듯하지 않나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0호 2016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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