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에 갇혀버린 주크박스의 가능성
<페스트>
서태지 뮤지컬
완성되기도 전에 기획 단계부터 화제가 되는 작품들이 있다. 뮤지컬 <페스트>도 그런 경우다. 이유는 분명하다. 이게 다 서태지 때문이다. 서태지라는 이름의 무게는 상당하다. 대중음악 시장에서 서태지는 한 번도 무릎 꿇어본 적이 없는 뮤지션이니까. 흥행이든 화제성이든 완성도든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그의 음악은 의미를 상실한 적이 없었다. 대중음악의 범주를 넘어 90년대 새로운 문화 변동의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서태지. 그는 언제나 대중문화의 앞에 있었다. 서태지의 음악으로 뮤지컬을 만든다고 했을 때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성공을 장담하기엔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변수이겠지만, 고전을 예상하기엔 서태지의 문화적 감각에 대한 신뢰가 두터우니 말이다. 그래도 서태지인데. ‘아이들’이었던 시절에도 사회적 이슈까지 아우르는 그의 뛰어난 음악적 전략은 많은 문화평론가들의 분석 대상이 됐을 정도였으니, 뮤지컬이라는 대중 장르에서 어설픈 작품을 내놓지는 않으리라는 기대치는 서태지를 비롯한 제작진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됐을 거다.
그런데 그 부담은 어느 정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주크박스에 담기는 스토리가 까뮈의 소설 『페스트』라니. 쉽고 말랑한 이야기로 가지 않고 진지한 문제의식에 무게중심을 싣겠다는 의도가 선명하게 각인된다. 서태지 음악의 맥락을 차별화하는 데는 시작부터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문학 작품을 뮤지컬로 각색하는 것도 만만찮은데 게다가 주크박스라는 제약 안에서 까뮈를 녹여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주크박스에서 원본의 권위는 전적으로 노래에 있다. 제아무리 까뮈라도 서태지에게 맞춰져야 하는 거다. 이야기는 노래의 원본다움을 훼손하지 않은 채 그 위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구성의 묘미를 발휘해야 한다. 절대적 상황에 마주선 인간 군상을 다루고 있는 원작의 이야기가 주크박스라는 제한된 틀 안에 어떻게 담을 것인지. 시도 자체가 부담스럽다. 만약 이런 시도가 성공한다면 문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드문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완성도는 음악이라는 원본과 문학이라는 원본, 두 개의 축 사이에 있는 셈이다.
주크박스로서의 성패
음악 원본을 기준으로 볼 때 주크박스 뮤지컬 <페스트>는 일정한 성과를 이뤄냈다. 무엇보다 서태지의 음악이 뮤지컬 넘버로서 무척이나 잘 어울려 놀라운 순간이 적지 않았다. 풀 오케스트라 뮤지컬 넘버로 편곡된 록 음악은 장중하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원곡이 배반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는 느낌이 드는 거다. 작품을 위해 일부러 쓴 곡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서태지의 노래는 극의 분위기에 잘 어우러져 극 전체를 선도해 나간다. 초창기의 귀에 익은 노래나 달달한 발라드를 기대한 관객은 좀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서태지의 록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그의 음악을 조금 다른 층위에서 즐기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울 수 있다.
물론 음악적으로 모든 부분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배우들의 노래는 아직 아쉽다. 배우 개인의 가창력 때문이기도 하고, 극의 분위기는 고조됐는데 노래의 톤은 낮아져버리는 약간의 불일치 때문이기도 하며, 리듬과 비트의 자리에 장중함과 무게감이 들어오느라 조금은 평범해져버린 음악의 뉘앙스 때문이기도 하다.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도 답답하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이런 사소한 문제를 비롯해 가창력의 보완이나 스타일의 일관성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유기적이지 않은 노래의 맥락 등 짧은 시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적잖아 보인다. 일례로 페스트가 덮친 죽음의 공포에 사람들이 발버둥 칠 때 ‘죽음의 늪’이 넘버로 활용되는 게 적당했을까?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는 존재하지만 자초한 죽음(‘죽음의 늪’)과 밀어닥친 죽음(페스트)의 차이는 크다. 극적 상황과 원곡의 내용에 간극이 벌어지면 그 사이에 끼워 맞추기의 억지스러움이 들어온다. 이야기와 노래가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원곡의 의미는 새로운 맥락으로 확장되게 마련이건만. 주크박스는 음악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이야기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디스토피아의 무리수
까뮈의 소설을 원작 삼은 것부터가 무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페스트』라는 작품 자체의 문학적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메르스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소설 속의 상황과 인간 군상이 더 이상 낯설지 않으니 말이다. 이토록 발전한 세상에 백신이 없는 전염병이라니. 전염병이 횡행하는 상황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사실을 축소하는 당국의 모습이나, 최고 수준 운운하면서 전혀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의료 체계나, 공포에 휩싸여 자기만의 벽을 쌓아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위기를 이용해 이익을 챙기려는 파렴치한 인간이나, 까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을 우리도 비슷하게 겪었다. 어떤 면에서 소설 『페스트』는 우리에게 실존의 사상이 아니라 실제의 경험인 셈이다. 소설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어쩌면 지금이 적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뮤지컬의 상상력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불러온다. 오랑시는 기술로 구현된 유토피아의 미래 세계로 바뀌는데 이 유토피아의 모습이 어딘지 익숙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던 거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통제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 작가는 그저 배경을 미래로 바꿨을 뿐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겠지만 정작 이런 설정 자체에 담겨있는 방향성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디스토피아의 관심은 유토피아의 허구를 벗기는 데 있다. 미래의 성취에 기댄 유토피아의 확실성과 완전함이 무너질 때 디스토피아의 악몽은 시작되는 법. 디스토피아는 미래를 향한 의심인 것이다. 그 의심은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그러니 디스토피아가 극의 배경으로 설정되는 순간 까뮈의 소설이 제기하는 페스트의 상징성은 날아갈 수밖에. 디스토피아는 인간이 추구하는 미래를 향해 질문하지만 페스트는 지금 여기의 삶을 향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번지수를 영 잘못 찾았다. 소설을 가져온 이유는 시작부터 사라져버렸다.
시작부터 어긋나니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품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 미래 사회의 설정은 유치하기 짝이 없고(기억 제거와 욕망 해소를 행복의 조건으로 보다니, 기억과 욕망이 행복의 전제인 것을!), 상징성을 잃어버린 전염병은 느닷없이 등장하며(왜 페스트가 발병하는지, 그것이 시스템의 어떤 하자 때문인지 설명해 주길!), 인물들은 아무 개성 없는 전형적인 캐릭터가 돼버리고(사랑스런 타루? 원작의 타루를 돌려 달라!), 주제의식은 대사 몇 줄로 설명되고 만다(몰려든 사람들이 왜 갑자기 각성한 거야?). 인물을 설정하는 방식과 주제를 담아내는 방식은 특히 문제가 심각하다. 타루는 그렇다 쳐도 코타르 같은 인물은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평소에는 아무 존재감 없이 살아가다가 페스트가 창궐할 때 살아나는 이 악한이야말로 언제든 다시 사람들 속에 파고들 페스트 같은 존재 아닌가. 그런데 이 인물을 행복주식회사 CEO로 만들어버렸다. 흔하디 흔한, 닳고 닳아 재미도 없는 할리우드 악당으로 말이다. 계몽적인 대사로 주제를 설명하려는 것보다(‘당신에게 페스트는 무엇인가요?’라니.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 실망스러운 상상력이다.
텍스트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해석해 주던 정승호의 무대도 이번엔 의외다. 모든 장면을 설명하려는 듯 장치나 세트 전환이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분주하다.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이었던 무대 운용의 상상력을 역시 기대했건만. 연출도 그리 훌륭해 보이진 않는다. 이야기를 만지는 솜씨나 무대에서 장면을 잇는 솜씨나 모든 게 삐걱댄다. 마지막 장면 타루의 영상은 완벽한 사족이고. 서태지도 까뮈도 주크박스도 하나도 쉬운 게 없다. 음악의 완성도를 살리려면 무엇을 정리해야 하는지는 확연하다. 결심하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5호 2016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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