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을 걷어낸 낭만의 산뜻한 품위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시인의 사랑
작품보다 연애사로 더 많이 기억되는 예술가들이 있다. 로댕을 떠올리면 비운의 연인 까미유 클로델이 생각나고 피카소 하면 그의 사랑에 속아 미치거나 자살한 여자들이 떠오르는 식이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근대에 활동했던 문인들을 생각하자면 그이들의 작품보다 가십이 더 유명한 경우가 많다. 김우진의 희곡을 읽어본 사람보다 윤심덕과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테고, 이상의 시는 잘 몰라도 금홍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만일 윤동주가 연애를 했더라면 「서시」보다 그의 연인에게 더 관심이 쏠렸을지도 모른다.
백석도 마찬가지다. 백석이라 하면 마두역 지나 백석? 되물을 사람도 있을 테고, 「사슴」이라고 하면 백석의 시집보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을 먼저 떠올릴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백석과 자야의 연애는 그의 시보다 훨씬 유명하다. 엄청난 규모의 요정 대원각을 미련 없이 시주하면서 ‘천억이 그이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을 남긴 자야. 이 말보다 백석의 시를 높이는 말이 어디 있겠으며 이 말보다 그들의 사랑을 증명해 주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천억 원이라는 재산의 규모가 비현실적인 게 아니라 시 한 줄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 자야와 백석의 사랑이 더 비현실적인 거다.
백석뿐 아니라 시인의 사랑은 극적이지 않았던 예가 없다. 세상이 요동치는 때 예술가의 삶이 녹록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들의 삶은 영화와 공연으로 종종 옮겨졌더랬다. 하지만 스크린과 무대로 옮겨진 그들의 사랑은 실제 이야기보다 훨씬 밋밋할 뿐 아니라 구질구질하기 일쑤였다. 소설 같은 사랑이 현실의 맥락으로 옮겨질 때 구차해지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만, 여기에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배경과 지식인이라는 인물 배경이 더해지면서 시인의 사랑은 현실도피의 기벽이거나 현실 외면의 무책임이 돼버리고 여인은 자기의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 동행자 내지는 희생자처럼 그려졌던 거다. 시인의 삶이 빛나는 건 그의 시 때문이라는 사실을 놓쳐버릴 때 시인의 사랑은 민폐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의 삶과 사랑에 집중하려면 그의 시와 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백석의 시가 들린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미덕이 여기에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작품은, 물론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주된 이야기 틀로 삼지만, 백석의 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뮤지컬에서 시를 극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처럼 뮤지컬에 잘 어울리는 장르가 어디 있겠냐 말할 사람도 있을 거다. 시는 그대로 가사가 될 수 있고,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지 않겠냐며.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 생각되는 가능성을 당연하게 보이는 결과물로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우린 이미 알고 있잖나. 시가 뮤지컬의 가사가 되었을 때 아름답기보다는 지루해지는 것을 적잖이 경험하기도 했을 테고. 시를 노래로 읊노라면 극의 시간이 멈추거나 필요 없는 감상이 넘치는 것도 문제지만 시가 앞 대사를 부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 시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반복되는 대사로만 여겨지게 마련이다. 시와 시 사이의 경계도 흐려져 이 시나 저 시나 비슷비슷한 감상의 나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럽쇼, 이 작품은 시를 노래하는데도 지루하기는커녕 시선을 빼앗고 귀를 열게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시를 활용하는 이 작품의 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백석의 시는 감정을 늘어놓는 장치가 아니라 장면과 상황을 이끌고 전환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한마디로 시가 대사에 그치지 않고 연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극의 흐름을 멈춰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극의 시간을 바짝 당겨놓는다고나 할까. 시 한 편을 노래하는 동안 시공간은 중첩되고 스토리는 압축된다. 예를 들자면 백석과 자야가 처음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의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는 사람 이름을 맞춰가며 농을 주고받다가 어느덧 마음을 열면서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이 그리 길지 않은 노래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이 빠르지도 어색하지도 않더라. 극의 물리적 시간은 당기면서도 관객이 느낄 감정의 시간은 충분히 확보하는데 그 솜씨가 능숙하다. 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배치하고 노래를 활용하여 장면을 전환하는 감각도 극의 군데군데에서 자주 반짝인다.
그래,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 감각이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풀어내면서 재현과 설명의 강박을 벗어던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지도 않고 심각하게 재현하지도 않는다. 듬성듬성 놓인 돌다리처럼 굵직굵직한 이야기만 툭툭 던져놓는 식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은 그저 분위기로 따라잡아야 하는 사연도 꽤 많다. 하지만 작품은 그것을 설명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시를 기준으로 그들의 사랑에 큰 맥을 잡을 뿐이다. 모두 시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다. 자칫 그들의 사연을 모두 극에 담다 보면 백석의 시가 지루한 감정을 부연하는 뮤지컬 넘버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관객에게는 친절하지 않지만 극의 감정적 집중력은 오히려 높아진다. 그래서일 거다. 백석의 시가, 때때로 말이 분명치 않음에도, 들린다.
감상이 아닌 낭만으로
이 작품의 감정적 집중력이 높아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감상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점. 서정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감상의 늪에서 허우적대지 않는다는 것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미덕이다. 이야기의 틀 자체에서부터 거리두기의 설정은 명확하다. 늙은 자야와 젊은 백석이 기억을 더듬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틀거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형의 전체가 아니라 과거형의 조각으로 분산시킨다. 필요에 따라 기억은 소환되고, 소환된 기억 속에서 정서의 색채는 이미 달라졌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작품에 웃음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첫사랑이 친구와 결혼하는 것을 바라보는 백석의 모습은 엉성하고, 두 번째 결혼을 안 하겠노라 아버지의 매를 피하는 백석의 곤경과 자야의 분노는 해학적이다. 두 번째 결혼은 실제로 이들의 이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건이건만 극에서는 이마저도 농담처럼 눙치고 넘어가버린다. 시인의 사랑을 바라보는 젊은 작가들의 감각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이런 감각 덕에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인물은 자야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이거나 희생적인 전형의 틀에 갇혀버리기 십상인데, 이 작품에서 자야는 백석보다 단단하고 현실적이며 지속적인 사랑의 주체로 그려진다. 다시 돌아올 면목도 없는 주제에 밤늦게 찾아와 밥을 달라는 백석을 보며 ‘아이고!’, 기가 막힌 듯 고개를 꺾는 여자 주인공은 지금껏 없었다. 익숙한 장면이 새삼스러워지는 건 전적으로 자야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이다. 여기엔 자야를 연기한 정인지의 덕도 크다. 작은 무대의 정감을 살리듯 배우들의 조곤조곤한 연기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결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시를 읽을 때 드러나는 화술의 한계는 감출 수가 없더라. 백석의 시를 날것으로 읊을 때 가장 듣기가 힘들었음은 이 작품의 티요, 배우들의 티다.
피아노 한 대의 음악에 조명으로 소품의 품새까지 다듬는 최소한의 만듦새는 단정하다. 말을 최소화한 시처럼 무대 언어를 최소화한 공연이다. 피아노의 선율이 아름다워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만큼은 관객이 쉽게 흥얼거릴 만큼 대중적인 멜로디였다면 어땠을까,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백석의 시가 사람들의 노래가 된다면. 낭만적이지 않나. 감상이 사랑의 설움에 겨워할 때 낭만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믿는 것이니, 천억 원의 가능성보다 시 한 줄의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 있는 마음은 낭만이라는 전위에서만 나올 수 있다. 이 작품이 더욱 낭만적인 공연이 되어 관객의 마음에 낭만을 심을 수 있기를. 최백호의 낭만이 아닌 백석과 자야의 낭만으로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9호 2016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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