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스며든
믿음
정민의 지난 무대를 살펴보면 <사의 찬미>, <트레이스 유>, <비스티> 등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작품들이 유독 눈에 띈다. 이들 무대에서 그는 믿음직한 모습으로 극의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어찌 보면 큰 키와 선한 인상이 전해 주는 듬직함이 곧 무대에서 그대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지난해 초연 후 다시 돌아온 <리틀잭>. 초연 멤버였던 정민의 출연이 반가운 이유 또한 이런 그의 존재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십 년 넘게 배우 생활을 했는데, 그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애착이 가는 작품이에요.” 지난해 <리틀잭> 초연 무대에 올랐던 정민.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환히 웃었다. 힘들었던 기억조차 좋은 추억으로 남은 작품. 그에게 <리틀잭>이 바로 그런 무대였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은 기타와의 만남.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기타의 매력을 한껏 느끼게 되었다. “남자들의 로망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거잖아요. 그 로망을 무대에서 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죠. 어린 시절 꿈꿔 온 일 중 하나였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성격이 좀 소심했어요. 그래서인지 마음속에 해보고 싶은 일도 많았죠. 그걸 분출해 보려고 대학교 때는 눈 딱 감고 춤 동아리에도 들어가 봤어요. 하지만 결국 밴드 활동은 못해 봤거든요. 그래서 록 밴드의 보컬인 잭을 처음 마주했을 때 생각했죠. 이 작품 무조건 해야겠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막상 그의 손에 쥐어진 기타는 생각만큼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예전에 군대에 있을 때 후임병에게 아주 잠깐 기타를 배운 적이 있어요. 그 후 17년 만에 처음 기타를 잡은 거였거든요. 그런데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정말 노래 한 마디를 못 넘겼어요. 밴드랑 함께 연주하려면 박자가 생명이잖아요. 공연 이 주 전까지 이걸 마스터 못하면 무대에 못 오르겠다 싶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띵!’ 하며 되는 거예요. 그 즐거움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죠. 그때부터 정말 신 났어요.” 기타 줄을 수없이 튕기며 생긴 손가락의 상처, 손끝이 너무 아파 잠을 자지 못했던 고통, 이 모든 순간들을 지나고 나니 어느덧 이 작품은 그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기타를 잘 치지는 못하지만, 즐길 수 있는 단계에 다다르게 됐잖아요. 그것만으로 의미가 커요. 그러니 이 작품이 제게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리틀잭>에서 정민이 연기하는 잭은 첫사랑의 기억을 가슴에 품고 노래하는 순수한 남자다.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작품 속 잭과 줄리의 첫사랑에도 슬픔이 잦아드는 순간이 온다. “물론 그녀를 다 이해했다면 거짓말이겠죠. 미움도 분명히 존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묻지 않는 거죠. 줄리가 아름다워야 잭도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거니까요.” 정민은 이들의 첫사랑을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이라고 이야기한다. “잭은 자신의 노래들을 그것을 존재하게 해 준 줄리에게 바쳐요. 그 자체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꼭 슬플 때만 우는 건 아니잖아요. 정말 행복할 때 흘리는 눈물도 있거든요. 행복이란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만큼 아름다운 눈물인 거죠. 흔히들 추억을 아픔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지만 첫사랑의 기억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에요. 행복한 기억이 크지만 그걸 다시 함께하지 못한 아픔인 거죠. 그런 만큼 잭의 마지막 눈물이 아픔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해요.” 그는 결국 이 작품에서 그리는 첫사랑의 기억은 ‘행복’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만큼 공연이 막을 내렸을 때, 관객들이 첫사랑을 떠올리며 웃음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내내 밝고 선한 에너지를 전해 주었던 정민. 배우로서 앞으로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 또한 그의 모습과 닮아 있어 인상적이었다. “요즘 <윤식당>이란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봐요. 그런데 거기 출연하는 배우들이 참 평화로워 보이더라고요. 저런 여유와 평화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싶었어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저런 색깔을 갖고 일을 하면 얼마나 멋있어요. 저도 여유와 평화로움을 유지하면서 일상생활과 배우 생활을 조화롭게 해나가고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배우일 수 있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만 쫓아갔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일 년 일 년 지날 때마다 한숨 쉬는 날이 많았죠. 하지만 이젠 욕심을 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하루하루 즐겁고 재밌게 살아가고 있죠. 오늘 하루를 여유롭게 살면서 공연 연습을 하고 무대에 오르고, 또 관객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삶.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에요.” 현실에 쫓기지 않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사는 것. 정민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꾸밈없이 천천히 배우로서 삶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5호 2017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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