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품격
지난 2015년 여름에 초연된 창작뮤지컬 <아리랑>으로 뮤지컬에 첫발을 내디딘 소리꾼 이소연. 그녀가 극 중 들려준 정갈한 소리는 예인 차옥비의 매력을 살리기에 충분했고, 나아가 작품의 격을 높였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런 그녀가 재공연에 다시 참여한다.
“저를 다시 불러주기만 한다면 무조건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 뮤지컬은 안 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아리랑> 초연 당시, 국립창극단 소속 배우 이소연이 뮤지컬 출연을 결심했던 이유도 단순했다. “뮤지컬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 역할은 놓치면 안 되겠다 싶었죠.” 열한 살 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줄곧 외길을 걸어왔을 뿐 아니라, 지난 2014년 초연된 국립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변강쇠 점 찍고 옹녀>에서 당찬 옹녀를 연기해 간판 배우로 우뚝 솟은 그녀가 뮤지컬 배우로 새길을 모색했을 리는 없을 터. 무엇이 그녀를 새로운 무대로 강렬하게 끌어당겼을까? “라이선스 뮤지컬은 물론이고, 창작뮤지컬에서 소리가 쓰이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뮤지컬을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아리랑>은 창극단에서 함께 작업해 본 고선웅 연출님이 지휘하는 작품인 데다 우리 민족의 역사 이야기에 소리꾼 역할이래서 자연스레 마음이 갔어요. 저하고 교집합이 있는 캐릭터라 새로운 도전에 대한 부담이 덜 했죠.”
이소연의 첫 뮤지컬 도전작 <아리랑>은 조정래의 동명 장편 소설을 원작으로, 일제 강점기 민초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애환을 그린 작품. 모든 등장인물들이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지만, 이소연이 맡은 차옥비는 유독 갖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애이불비’ 정신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총살당하는 아버지와 그 충격으로 실성해 자살하는 어머니, 사랑 때문에 옥에 갇히게 되는 오빠. 차옥비 그 자신은 오빠를 구하기 위해 일본인의 첩이 되는 인물이다. 스스로 ‘물 흐르는 듯 순탄하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이소연은 어떻게 한을 품은 여인 차옥비를 상상했을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직접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았더라도, 그 시대의 설움과 아픔을 몸으로 느끼잖아요. 옥비를 기구한 가정사를 지닌 개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원통한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옥비가 노래할 때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뼈아픈 슬픔을 어루만져 준다는 느낌으로 소리를 냈죠. 일본인들에게 우린 굴하지 않는 의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도 소리에 담았고요.” 그녀가 초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점은 발성이었다. “흔히 ‘소리’ 하면 탁하고 쉰 목소리를 떠올리잖아요. ‘판소리’ 하면 보통은 따분하고 고루하다고 생각하고요. 뮤지컬을 보러 온 관객들 가운데 저를 통해 소리를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제가 잘 못하면 창극을 영영 보고 싶어지지 않을까봐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제가 전통 소리와 뮤지컬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거든요. (웃음)”
이소연은 우리 전통 소리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에 수줍은 듯 웃었지만, 처연한 애절함을 담은 그녀의 소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통한 것만은 분명하다. 올 8월, 3년 만에 재공연되는 창작뮤지컬 <서편제>에 당당히 주연으로 캐스팅됐으니 말이다. “첫 작품을 같이했던 배우들이 저보고 앞으로 뮤지컬도 많이 하라고 했을 땐, 사실 기회가 또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어요. <서편제>의 송화는 소리꾼의 삶을 제대로 담고 있는 영광스러운 작품이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초연부터 <서편제>를 이끌어온 국내 대표 국악인 이자람, 뮤지컬계의 디바 차지연과 트리플 캐스팅돼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그녀는 새로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노라 말했다. “다른 캐스트들과 차별점을 갖기 위해 일부러라도 더 다른 색깔의 송화를 보여주려고 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아요. 두 배우가 하는 정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색깔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올여름 <아리랑>과 <서편제>를 연달아 소화하며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낼 이소연. 지금 그녀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아리랑> 초연을 끝내고 나서 소리에 관심이 생겨 창극단 공연을 보러 와주신 관객분들이 계셨어요. 그때처럼 뿌듯할 때가 없었죠. 소리꾼으로서 하나 바람이 있다면, 미디어에서 창극단 작품을 소개할 때 더 이상 ‘창극’이 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무대든 소리를 널리 알릴 수 있다면, 제 역량이 되는 한 참여하고 싶어요. 그게 제 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7호 2017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