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으로 각색되지 못한 일생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감상의 순서
다 좋다고 하는데도 선뜻 보게 되지 않는 영화가 있다. 나에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그랬다. 한 사람의 삶을 혐오스럽다는 단어로 요약하는 이 강렬한 제목에 지레 겁을 먹은 것도 있고, 분명 혐오라는 외피에 감춰진 깊은 통찰이 있겠건만 누군가에게 싫고도 미운 사람이 되어가는 이의 인생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혐오하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멀쩡하겠는가. 사람의 밑창을 보느라 괴로울 거라는 선입관에 이래저래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가 공연으로 처음 마츠코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 거다. 공연을 보고 난 후 소설과 영화를 찾아보았다. 왜 많은 사람들이 마츠코의 이야기에 매료되는지 알겠더라. 평범한 여성 수난사가 아닌 사랑과 고통의 상식을 홀랑 뒤집는 이야기는 먹먹하고, 특히 영화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 감동의 색깔이 단순하지 않은 것도 참 좋더라. 이야기와 영화를 찾아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뮤지컬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적어도 나에게는, 고마운 작품이다.
조금 안타까운 건 이 이야기를 뮤지컬로만 접한 관객들의 경우이다. 공연을 통해서만 마츠코의 일생을 봤다면 그 여자의 한심한 남성 편력에 분통 터지는 한숨만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남자들만 만나서 최악의 취급만 받다가 끝내 맞아 죽는 여자의 일생이라니. 이게 뮤지컬에 어울리는 이야기인가?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남자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었네를 외치는 사랑 결핍증 환자, 뮤지컬의 마츠코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인물에게 공감대를 갖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극의 마지막에 이를 때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이 있긴 하다. ‘마츠코를 만났던 남자들이여, 왜 그때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는가!’라는 조카 쇼의 울음 섞인 질문이 쏟아질 때다. 공연(만)을 본 관객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답했을 거다. ‘애초에 그런 놈들은 만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마츠코의 일생이 겨우 이런 뻔한 대답을 얻기 위한 이야기였을까? 이 천박한 연애담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그런 통속적인 상식에 깃들어 있지 않다. 이런 분들에게는 영화를 권해 드린다. 뮤지컬의 의문이 바로 풀릴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소설과 영화로 이 작품을 먼저 본 관객들의 경우이다. 공연을 보고 나서 영화와 소설로 거슬러 간 사람들은 내용이 궁금해서겠지만, 소설이나 영화를 거쳐 공연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은 그 내용을 말하는 방식이다. 소설의 화술은 디테일하고 영화의 화술은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뮤지컬은? 특히나 영화에 담긴 뮤지컬의 느낌이 진짜 뮤지컬에서는 어떻게 표현될지 많이들 궁금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쉽게도 뮤지컬의 만듦새는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소설의 흔적도 있고(쇼의 정체성!) 영화의 흔적도 있지만(화려한 색채의 영상!), 정작 소설도 영화도 아닌 공연으로서 이 작품이 갖는 독자성이 무엇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이야기로 소설의 디테일을 따라잡지 못하고 시각적으로 영화의 색채와 이미지를 따라잡지 못하는 건 오히려 괜찮다. 어차피 이건 소설도 영화도 아닌 공연이니까. 하지만 공간과 움직임의 상상력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둥실 예쁜 폰트의 자막이 떠오르는 순간 이 작품이 공연이어야 할 이유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관객이 공연에서 읽고 싶은 것은 글자가 아니다.
다시 쓰기 위해서는
사실 이런 문제들은 뮤지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만의 것이 아니다. 원작이 있는 거의 대부분의 뮤지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허점, 바로 각색과 관련한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을 뿐이다. 창작뮤지컬에서 각색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완성도에서 성과를 거둔 작품이 드문 이유는 단순하다. 각색은, 원작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원작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한 작가가 풀어내는 또 다른 이야기임을 자주 간과하기 때문이다. 각색은 다시 쓰기이다.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반복이 아니라 다시 쓰기를 통해 같은 이야기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원래 이야기가 있는 다시 쓰기의 결과물이었다. 이것이 곧 대본의 역사요 이야기의 본질일지니. 하지만 각색의 기반이 작가적 개념에서 경제적 개념으로 쏠리는 순간 이야기는 진화를 멈춰버리고 만다. 원소스멀티유즈라는 실용적 기획에서 원작이란 성공의 코드에 다름 아닌바, 원작으로부터의 독립보다는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이런 실용성으로 기획된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작품이 보여주는 다시 쓰기의 품새에서 작가적 개념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도, 여타의 다른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원작의 줄거리를 요약하느라 급급하다. 영화가 아니라 소설을 원작 삼았음을 보면 스타일이 아닌 서사 자체에 집중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줄거리 소개에 바쁜 와중에 다시 쓰기의 새로운 해석이 배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 결과 줄거리를 요약하려 할수록 뮤지컬의 이야기는 원래의 이야기로부터 멀어져버린다. 마츠코는 자기를 사랑할 줄 몰랐던 불쌍한 여자에 불과했으니(정말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위해서 해석의 거리를 두고자 했던 의도는 알겠다. 그런데 작가이자 연출인 김민정은 아직 그 거리를 정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마츠코의 일생을 되짚는 인물인 조카 쇼 캐릭터에는 작가의 이런 어정쩡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극적 기능으로 보자면 그는 관찰자인, 고로 마츠코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건만 극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마츠코에게 동화되어버린다. 이런 애매함은 연출에서도 이어진다. 쇼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퇴장하지 않고 모든 장면에서 사건을 지켜보지만, 사실 그래야 할 실질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다. 관객과 같은 입장에서 마츠코의 이야기 바깥에 있어야 할 인물이 아무 과정도 없이 어느새 마츠코의 이야기 안으로 바짝 들어가 있어서 관객과 마츠코 사이를 중개하기는커녕 처음부터 마츠코를 대변하는 식이다. 쇼라는 캐릭터는 작가의 거리 두기를 의도한 인물이겠지만 실제로는 몰입하는 독자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원작의 재현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건 아닐까. 각색에서 다시 쓰기란 단지 내용에만 국한된 게 아니니 말이다. 각색은 해석적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형식적 정체성이기도 하다.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진화하는 또 다른 방식은 형식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뮤지컬만의 화술이 입체적으로 구현됐는지를 보자면 역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음악은 혐오스러움의 외피에 가려진 마츠코의 사랑스러움과 긍정적인 면모를 따뜻하게 그리고 있지만, 대본이 담아내지 못한 내용과 의미의 엇박자를 설명하느라 시종일관 쉬질 못한다. 여기다 대고 극을 장악하는 스타일의 멋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대 역시 마찬가지다. 한가운데 놓인 옹색한 상자 무대에다 넓게 펼쳐놓은 영상이 전부인 무대는 시각적인 상징을 구축하는 데 아예 관심이 없다. 그저 마츠코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걸 무성의하게 도울 뿐이다. 연애는 방에서, 그 밖의 것은 영상으로. 이야기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그저 가사에만 맞춘 것 같은 안무도 고민 없어 보이긴 매한가지다. 죄다 평면적인 설명만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화려한 스태프진의 이름이 무색할 따름이다.
다시 읽어야 한다
솔직히 각색과 연출을 맡은 이가 여성인 김민정이었기에 기대감을 더 가졌던 것도 있다. 여성주의가 회자되는 지금,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여성상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마츠코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할지, 최선을 다해 불행을 향해 달려가는 마츠코의 사랑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지, 남성 작가들과는 다른 접근이 있을 거라 기대했더랬다. 하지만 그런 접근은 아직 이 작품에 없다. 각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시 쓰기 위해서는 다시 읽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츠코의 일생에 대한 작가 자신의 입장이 먼저 있어야 한다. 역겨울 정도로 즉흥적이고 동물적이며 의존적인, 동정이나 연민조차 생기지 않는 이 여자의 일생(lifetime)이 인생(human life)을 향해 어떤 말을 걸고 있는지 알아채야 할 의무가 작가에게는 있다. 그 말 걸기에서 생긴 이야기를 자기의 말로 다시 이야기하는 게 바로 각색일 터. 버림받아도 또 사랑하는 마츠코처럼 이 작품에도 이야기를 향한 사랑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1호 2017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