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레터>는 대본이 정말 재밌었어요. 그래서 대본을 읽으면서 빨리 음악을 쓰고 싶었어요. 오선지가 아닌 대본 곳곳에 바로 떠오르는 악상과 코드를 메모해 놓았을 정도죠. 경성 시대 문인들의 이야기지만, 음악에 경성 시대의 색깔을 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한재은 작가님도 저와 생각이 같았어요. 그래서 특별히 그 시대의 자료를 찾아보기보다는 작품 속 인물들의 마음에 더욱 집중했어요. 해진을 향한 세훈의 마음은 동시대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잖아요. 그런 만큼 음악은 오히려 경성 시대라는 색깔을 빼고, 현대적으로 표현해 보려 했죠.
Number 7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에요. 예술가들의 이야기라 더 공감이 갔어요. 가사도 정말 좋았고요. 이 곡은 멜로디는 밝지만, 알고 보면 아픈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예요. 슬픈 노래였기 때문에, 일부러 약간 밝게 쓰려고 한 거죠. 사실 <팬레터>를 작곡할 때 제가 임신을 했어요. 그리고 한창 그루브에 심취해 있었죠. 똑같은 노래를 불러도, 그루브가 있으면 느낌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태교로 클래식 음악 대신 그루브 넘치는 흑인 음악을 듣기로 했어요. 그랬더니 배 속의 아가가 힙합을 들으면 막 움직이며 놀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쭉 그루브한 음악을 들으며 지냈는데, <팬레터>는 문인들의 이야기다 보니 그런 음악을 쓸 수가 없더라고요. 단, ‘Number 7’은 가사를 읽고 그 느낌대로 써 내려간 곡이었는데, 쓰고 보니 자연스레 그루브가 녹아 있었어요. 미디엄 템포로 그루브하게 부르는 노래거든요.
Muse
이 곡도 가사가 좋아서 굉장히 빨리 썼어요. 한번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의 뮤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어요. 제 대답이 ‘남편’이었는데요. 로맨틱한 답변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편의 기여도가 가장 컸거든요. (웃음) 왜냐하면 제가 곡을 쓰고 나면 바로 남편인 이승현 배우에게 불러달라고 했어요. 그 자리에서 들어보고 이상하면 곡을 고치기도 했죠. 그런 과정들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어요. 덕분에 남편도 악보 읽는 능력이 더욱 상승되었고요. 또, 보통 곡이 완성되면 작가와 연출가에게 들려줘야 하는데, 제 목소리가 하이톤이라 노래를 부르면 왠지 동요 느낌이 나거든요. 그래서 ‘Muse’도 남편이 가이드 녹음을 다 해주었답니다. 그만큼 기여도가 컸어요.
고백
2막 말미에 등장하는 ‘고백’은 원래 노래가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김태형 연출님이 의견을 주었어요. 1막 세훈이의 넘버인 ‘눈물이 나’가 참 좋아서, 그 곡을 한 번 더 듣고 싶다고요. ‘눈물이 나’는 세훈이가 최고로 행복할 때 부르는 노래거든요. 이 곡을 어떤 부분에 다시 넣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완성된 곡이 바로 ‘고백’이에요. 테마는 같지만,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만들어보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고백’은 ‘눈물이 나’와 같은 테마가 쓰였지만, 슬프고 처절한 느낌이 나요.
해진의 편지
처음에 한재은 작가님이 이 곡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나요. 가사가 문체라서 곡을 쓰기가 어려울 거라고요. 해진의 편지다 보니 워낙에 가사가 진지하고 슬펐어요. 그래서 음을 길게 끌거나 튀는 느낌 없이 담담하게 곡을 진행시켰죠. 도입은 조근조근하게 시작했어요. 편지글이다 보니 조금만 오버되어도 그 느낌이 살지 않을 거 같았거든요. 그러다 ‘그녀를 닮은 섬세함과 떨림’이란 가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포인트를 주었어요. 그때 즈음이면, 해진도, 세훈도, 관객들도 이것이 편지라는 걸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부터 해진의 마음 가는 대로 곡을 확 써 내려갔죠.
내가 죽었을 때
마지막 넘버인 ‘내가 죽었을 때’는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작곡한 곡이에요. 2015년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시즌1에서 이 작품의 작곡가로 매칭되어 완성된 대본을 받아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처음 대본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바로 이 곡을 쓰게 되었죠.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악상이 명확하게 떠올랐던 이유는 가사에 세훈이의 마음이 다 나와 있었기 때문이에요. 은유적인 가사는, 상상을 하면서 곡을 써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 곡은 상상할 필요가 없었어요. 온전하게 세훈의 마음이 되어, 곡을 써 내려갈 수 있었죠. 그리고 이 노래는 세훈 역의 배우들이 울음을 억지로 참느라 힘이 든대요. 그래서 이 곡이 끝난 후 꼭 무대 뒤에 가서 운다고 해요. ‘내가 죽었을 때’를 들을 때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세훈의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더욱 슬플 거예요.
섬세한 팬레터
이 곡은 마치 풀지 않은 숙제 같았어요. 쇼케이스 후 초연을 앞두고, 한재은 작가님도 저도 암묵적으로 이 곡을 심각하게 고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았죠. 그러던 중 병원에서 당장 수술로 출산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어요. 그래도 의사 선생님께 작품 상견례는 참석해야 한다고 특별히 부탁을 드렸죠. 상견례 후 바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건반과 노트북을 다 세팅해 놓았어요. 연습 과정 중에 음악과 관련된 요청이 오면 실시간으로 곡을 수정하거나 새로 써서 보냈죠. 조리원에 있는 2주 동안에도 건반은 꼭 챙겼어요. 그걸 보고 조리원에서 아기 조기 교육을 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웃음) 조리원에서 지내다 보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작곡하기 좋은 환경이더라고요. 덕분에 ‘섬세한 팬레터’는 수정하기 싫어서 피해 다녔는데, 결과가 만족스러웠어요. 보통 곡을 수정하는 것보다 새로 쓰는 것이 훨씬 쉽거든요. 이전에 알지 못했던 특별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1호 2017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