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불어온 새바람
겨울의 눈보라와 함께 찾아온 러시아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러시아를 배경으로 상류층 여인 안나가 금지된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세계 최초이자 한국 최초로 라이선스 공연되는 <안나 카레니나>에는 러시아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이 직접 참여해 눈길을 끈다. 그중에서도 연출가 알리나 체비크는 2014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은 <몬테크리스토>를 연출하기도 한 인물.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막 발돋움을 시작한 러시아에서 대형 뮤지컬 연출가로 활약 중인 그에게 러시아 뮤지컬과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러시아 뮤지컬의 한국 상륙
러시아 발레, 연극, 클래식은 유명하지만 러시아 뮤지컬은 아직까지 낯설다. 러시아 안에서 뮤지컬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인가?
러시아 뮤지컬의 역사는 길지 않다. 검증된 작품을 라이선스로 들여와 공연한 예는 많지만, 자체적으로 뮤지컬을 개발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이러한 도전에 앞장선 단체 중 하나가 <안나 카레니나>를 제작한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다. 새로운 장르에서 관객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수년간 노력했고, 그 결과 <안나 카레니나>가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 뮤지컬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또 우리가 보여줄 만한 것들도 있다. 그래서 이번 서울 방문이 양국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기대한다.
러시아 뮤지컬 시장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한국 뮤지컬 시장은 브로드웨이와 달리 공연 기간이 짧고, 주요 관객층이 젊은 여성이며,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반복 관람하는 마니아 관객의 영향력이 크다는 특징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관객들이 계속 찾아오는 한, 즉 높은 판매량을 유지하는 한 공연이 끝나지 않는다. 주요 관객층은 젊은 여성이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에도 공연을 수십 번 넘게 보는 팬들이 있다. 그들이 인터넷이나 블로그에 남기는 후기로 티켓 판매량이 결정된다.
<안나 카레니나> 외에 참여했던 러시아 창작뮤지컬은 무엇이 있나?
처음 연출을 맡았던 작품은 <정글북>이라는 아동 뮤지컬이었다. 이후 <오를로프 백작>, <제인 에어>, <몬테크리스토> 등의 작품에 참여했다. 러시아 관객은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 또한 그렇다. 특히 오래전 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작업하면서 다른 문화를 접하는 것이 재미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고전을 무대로 옮기면서 대형 LED 영상이라는 첨단 기술을 도입한 점이 인상 깊다.
무대에는 뒤쪽의 대형 스크린을 포함해 총 9개의 스크린이 있다. 스크린을 사용한 건 빠른 무대 전환을 돕기 위해서다. 원작의 클래식함이 자칫 고루하게 다가갈 수 있는데, 그렇지 않게 쇼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소품 등 무대만의 매력 요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기술을 이용해 관객에게 재미를 주고 싶었다. 디지털 화면과 영상에 익숙한 시대인 만큼, 뮤지컬도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한국 배우들과 작업해 본 소감은 어땠나?
초반에는 러시아와 한국의 연습 방식이 달라 어려움이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 따라 일한다. 하지만 한국 배우들은 브로드웨이식으로 일하는 게 습관이 돼 있어, 단기간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배우들이 이해하고 따라오려고 노력해 주어 프로 정신을 느꼈다. 지금은 한국 배우들과 사랑에 빠졌다.
러시아 작품을 한국 무대로 옮기면서 난관에 부딪혔던 장면이 있나?
무도회 장면이다. 이 장면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다시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무도회라는 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옛 유럽 문화이다 보니, 한국 배우들이 표현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당시 상류층 사교계에서 무도회는 모든 사건이 시작되는 공간이었다. 무도회에서 많은 이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 무도회 에티켓을 신경써서 가르쳤다. 대화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누가 누구에게 다가가선 안 되는지,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등등. 안나와 브론스키 역 배우들은 이 장면을 위해 따로 선생님을 초빙해 밤새도록 왈츠를 배우기도 했다.
여성 연출이 그리는 안나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기차역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기차역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바가 있나?
예술 작품 속에서 철로는 종종 운명과도 같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징한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철로는 안나의 인생과 죽음을 상징한다. 극 중 기차역은 안나가 사랑하는 사람, 브론스키를 처음 만나는 곳이다. 이 만남으로 멈춰 있던 안나의 인생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뒤이어 안나와 브론스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소, 마지막에 절망에 빠진 안나가 자살하는 장소 역시 기차역이다. 기차가 철로를 따라 나아가는 것처럼 안나의 인생도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뮤지컬에는 원작에 없는 MC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MC의 역할은 무엇인가?
안나와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처음 만날 때, 사람이 열차에 치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안나의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징조다. 이때 열차가 멈추면서 나는 끼이익 하는 쇳소리로부터 안나의 악몽이 시작된다. 쇳소리와 함께 철이 가득 든 보따리를 멘 남자의 환상이 악몽처럼 안나를 따라다닌다. MC는 이 환상을 표현한 인물로, 뮤지컬에서는 안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운명의 기관사 역할을 한다.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안나는 단순히 부도덕한 인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안나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나?
어떤 작품이든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창작자의 관점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19세기 남성 작가였던 톨스토이는 안나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성으로서 톨스토이와 다른 시선을 갖고 있다. 당대의 남성 중심적 사회는 여성이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작품 속의 안나도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고위 관료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다. 그런 안나가 브론스키를 만나 자기 인생에 부족했던 것을 찾은 것이다. 안나한테 부족했던 것은 감정이고 사랑이었다. 그런 점에서 솔직하게 행복을 추구한 안나의 행동은 여성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 비난받을 수도, 존경받을 수도 있는 행동이다.
뮤지컬은 원작처럼 안나와 브론스키, 레빈과 키티라는 두 커플의 이야기가 엇갈려 진행된다. 레빈과 키티는 작품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레빈과 키티는 톨스토이가 자신과 아내를 투영하여 만든 캐릭터로, 안나와 브론스키와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뮤지컬에도 안나와 브론스키, 레빈과 키티가 서로 다른 삶의 길로 갈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톨스토이의 소설에는 어느 쪽이 옳은 길인지 답이 나와 있다. 결국 올바른 길을 간 커플은 레빈과 키티라는 결론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질문하고 싶다. 안나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던 여자일 뿐이다. 과연 그 행복을 따라가는 게 옳은 일인지, 행복을 위해 어디까지 가도 좋은지, 그에 대한 답은 관객이 생각해 보게끔 열어두고 싶다.
연출가로서 방점을 찍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게 중요했던 주제는 용서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첫머리에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인간은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으며, 심판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안나를 비난하고 자살로 몰아붙인 사회를 겨냥한 구절이다. 뮤지컬에서는 이들과 달리 안나를 용서하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안나로 인해 브론스키와 관계가 틀어진 키티, 그리고 안나가 버리고 떠난 남편 카레닌은 큰 상처를 받지만 결국에는 안나와 브론스키를 용서한다. 내 생각에 카레닌은 안나를 잃은 후에야 자신이 진심으로 안나를 사랑해 왔음을 깨우친 것 같다. 관객들도 뮤지컬을 보고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돌이켜볼 수 있길 바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2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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