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풋한 에너지
파업을 일으킨 신문팔이 소년들 이야기로 신인 배우를 대거 발탁했던 2016년 <뉴시즈> 한국 초연. 그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는 신인이 있었으니, 바로 크러치 역의 강은일이다. 그가 연기한 절름발이 소년 크러치는 지켜주고 싶은 순수한 매력으로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 “사실 오디션을 본 이유는 춤 때문이었어요. 전부터 해외 공연 영상을 보며 안무를 외울 만큼 따라 췄거든요. 오디션 소식에 독기를 품고 지원했죠.” 앙상블로 지원한 강은일은 즉석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그룹 오디션을 보게 됐다. 그때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크러치다. “목발이 없어 한쪽 발을 꺾고 기면서 연기했어요. 다들 한 줄로 서서 심사위원을 보고 연기하는데 저는 기면서 다른 배우들을 보고 연기한 거죠.” 이 모습을 눈여겨본 데이비드 스완 연출은 그를 크러치로 캐스팅했고, 강은일은 무대에서 갈고닦은 춤 실력을 선보이지 못한 대신 비중 있는 역할로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강은일은 <뉴시즈>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다며 자신의 인복에 감사했다. 운이 좋았다는 듯 말했지만, 그를 지켜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허물없이 다가서는 친화력, 해사한 미소, 톤이 높은 목소리와 개구지고 명랑한 말투. 사람을 끌어당기는 환한 에너지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건 그가 혼자서도 한 시간은 너끈히 떠들 수 있을 만큼 수다쟁이였다는 건데, 선배들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기자간담회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강은일은 연습실에서는 막내라 이 흥을 다 발산하지 못한다며 웃었다. 그의 나이는 이제 스물넷이다.
강은일은 가족 가운데서도 넷째인 막내로 태어났다. 형, 누나에게 밀려 뭘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그는 여덟 살 때부터 형을 따라 교회에서 춤추며 독학으로 스트리트 댄스에 빠져들었다. “중학생 때 담임 선생님이 너는 무대 체질인 것 같으니 연기 학원에 다녀보라며 전단지를 건네셨어요. 2주 무료 수강이라기에 가봤는데 춤도 연기가 될 수 있다면서 마임을 가르쳐주시더라고요. 난생처음 연극 대사를 읊고 뮤지컬 노래도 불렀죠. 그렇게 2주가 지나고 나니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이후 한림예고 뮤지컬학과에 들어간 그는 발레, 재즈, 현대 무용 등 새로운 장르의 춤에 눈을 떴다. “1학년 때 갈라 공연의 주인공을 맡은 게 뮤지컬을 하기로 마음먹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막이 올라가는데 그 순간의 벅찬 감정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그때부터 강은일은 <아이다>, <코러스 라인>, <페임> 등 댄스가 강조된 뮤지컬을 보면서 열심히 연습했고, 2학년 때 뮤지컬 <13>의 오디션에 합격해 정식 데뷔했다. 명지대 뮤지컬학과에 입학한 뒤에도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댄스 전형으로 입학했지만 보컬 전형 연습실까지 기웃거리며 노래를 배웠다.
강은일은 2016년 <뉴시즈>에 이어 <아이다>도 앙상블로 오디션을 봤다가 메렙 역을 따냈다. 심지어 두 역할 모두 원캐스트였다. 하지만 이런 승승장구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아이다> 이후 소속사에 들어가기로 한 계획이 틀어지면서 작품 출연 계획도 모두 어긋난 것. 어렵사리 대학로 공연 오디션 기회를 잡았지만 고배만 마시며 ‘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단다. 결국 1년의 공백기를 보낸 후에야 2017년 <붉은 정원>의 리딩 공연에 참여했다. 부담을 내려놓은 덕인지 재미있게 공연했다는 그는 새로운 소속사인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의 러브콜을 받았고, 소속사 제작 공연인 <스모크>에도 캐스팅되었다.
어린 나이에 아담한 체구, 가는 목소리를 지닌 강은일은 그동안 사랑스러운 소년 역할을 도맡아왔다. 이상의 삶과 시를 소재로 한 <스모크>의 해 역시 초반에는 순수한 소년 같은 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기억을 되찾고 자신이 누구인지 각성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줘야 한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출님과 선배 배우들에게 쓴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추정화 연출님께 ‘넌 귀엽긴 하지만 연기는 빵점’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발가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사실 이전에 크러치와 메렙을 연기할 땐 제 외모와 목소리가 지닌 이미지 덕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여태까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역할만 하면서 얼렁뚱땅 관객의 눈을 속여 온 건 아닌가 반성하게 됐어요.” <스모크>는 강은일에게 첫 소극장 작품이자 처음 멀티 캐스트로 공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선배 배우들과 연습실에 모여 스터디하듯 계속 작품 이야기를 나눈 게 연기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다>의 메렙을 연기할 때는 이전 배우의 연기를 정답처럼 따라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어요. 하지만 이번에 같은 역할을 맡은 여러 배우와 함께 연습하면서 알았어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상의 시처럼, 이상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데 정답은 없다는 걸. 그걸 깨닫고 나니 저만의 이상을 선보일 용기가 생겼어요.” 공연이 올라간 지금은 그렇게 무서웠던 연출님에게 다른 작품도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며 강은일은 뿌듯해했다.
이제 네 편의 뮤지컬에 참여한 강은일은 언젠가 꼭 만나고픈 작품으로 혼자서도 무대를 꽉 채우고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헤드윅>, 그리고 마음껏 춤출 수 있는 <로기수>, <코러스 라인> 같은 작품을 꼽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원하는 건 <스모크>처럼 새로운 자극을 주는 작품이다. “계속해서 숙제가 생기면 좋겠어요. 공부하고 고민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그 다짐대로 강은일은 오는 7월 개막하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7호 2018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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