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을 꿈꿨던 황후, <엘리자벳>
모순적이어서 더욱 매력적인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인공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생애는 한마디로 요약가능하다. 모두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서 모든 것에 실패한 삶. 사실 엘리자베트는 지극히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모순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유형의 인간이 으레 그렇듯이 자신이 받은 상처는 한없이 곱씹으면서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입히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반성도 없었다. 엄격한 시어머니(이자 이모) 대공비 조피의 가혹한 훈육 때문에 고통받는 자신을 방치했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지만, 맘에 들지 않는 며느릿감이 보기 싫어서 아들의 약혼식에 불참한 것이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시어머니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키운 유일한 자식인 마리 발레리를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면전에서 그건 불행한 일이라고, 왜냐면 인생은 고통으로만 채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만큼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다. 이 정도면 경이로울 지경이다.
어리고 아름다운 신부로 화려하게 왕실에 입성했다가 호된 시집살이를 하고,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뒤늦게 자아를 찾기 위해 반격을 시도해 짧은 자유를 누린 후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공통점 때문에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예로 들어 엘리자베트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이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후에게서 생전의 다이애나가 보여준 꾸준한 이타심이나 선한 영향력을 찾기는 힘들다. 다만 정신 질환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정신병원을 꾸준히 후원하기는 했는데, 아마 그녀 자신이 평생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텔스바흐 가문이 미모와 정신병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 남성으로는 보통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2세를, 여성으로는 합스부르크 황후 엘리자베트를 예로 든다. 두 사람은 오촌 사이였다. 바이에른의 루드비히가 백조와 바그너에 미쳐서-속칭 디즈니성으로 유명한-노이슈반슈타인성을 짓는 동안, 엘리자베트는 라푼젤 수준으로 길고 풍성한 머리채를 지키면서 172센티미터에 40킬로그램 중반대의 몸무게를 유지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공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이니 당연히 그녀가 실행에 옮겼던 무리한 다이어트 방법들이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거의 현대 모델 수준으로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빈의 영원한 심벌
그렇다면 이 황후가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쪽으로 열정을 불살랐던 일은 없을까. 하나 있긴 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국 비슷한 위치였던 헝가리에 좀 더 많은 자유와 주권을 주고 싶다는 열망은 엘리자베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를 위시로 한 빈의 대귀족들에게 깊은 원망을 품고 있던 엘리자베트가 그들이 미워하는 약소국 헝가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황후는 헝가리인들의 권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하기에 이른다. 두 딸에 이어 외아들 루돌프를 낳은 후 지긋지긋한 후계자 생산의 의무에서 벗어나 임신을 극도로 피해 왔던 엘리자베트는 헝가리를 위해 아들을 하나 더 낳겠다는 결심까지 한다. 장남 루돌프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고 둘째 아들은 헝가리 국왕이 되기를 원한 것인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두 왕관을 독점할 때보다 헝가리 쪽에 유리한 구도가 된다. 엘리자베트는 미래의 헝가리 국왕이 될 아들은 그 영토 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헝가리까지 가서 출산을 하는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세 번째 딸 마리 발레리였다. 이렇듯 상식을 거침없이 뛰어넘는 제멋대로의 행동 때문에 헝가리의 매력적인 독립투사이자 정치가인 언드라시 백작이 엘리자베트의 연인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현대의 왕족이었다면 그녀의 사진 밑에 ‘혐성’, ‘민폐’, ‘관종’, ‘세금도둑’이라는 태그가 떨어질 날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엘리자베트는 오늘날까지 빈의 심벌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모차르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 현상이다.
스스로 선택한 비극적 결말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유명했으니 루키즘 때문일까? 그 이유가 없지는 않겠으나 미모로만 따지면 나폴레옹 3세의 황후였던 외제니 드 몽티조도 엘리자베트에게 뒤지지 않는다. 비극적인 죽음이 대중의 관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격동의 세기말 유럽 곳곳에서는 그 못지않게 다양한 방식으로 드라마틱하게 죽어간 왕족들이 넘쳐났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광기에 사로잡힌 희생자들 중 합스부르크나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인 가까운 인척들의 이름만으로 노래 한 곡을 만들고도 남는데 <엘리자벳>에서 프란츠 요제프의 악몽을 표현한 ‘질문들은 던져졌다’가 바로 그 곡이다. 유일한 후계자였던 황태자 루돌프는 애인과 동반 자살을 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선택한 페르디난트 대공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다. 폭력과 광기의 시대였다.
엘리자베트는 이러한 시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인지하고 미래를 예견할 만큼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적으로 뛰어났지만 그 인식은 어떤 쪽으로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 열여섯의 나이로 황후가 된 후로 그녀는 인생의 대부분을 반쯤 미쳐 있었고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는 괴짜였다. 자신의 지위에 맞게 행동하기를 거부했고 의무를 혐오했으며 오직 소진하고 소멸하기만을 꿈꾸었다. 아내가 아들처럼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던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그녀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 자신이 선택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나 황후의 온 생애가 죽음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사랑받은 딸 마리 발레리조차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삶이 눈부시게 빛날 때처럼, 우리는 가장 높은 곳에서 끝없이 조락하며 스스로 선택한 자기 파괴적 결말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도 매혹당한다. 건설적이거나 바람직하거나 존경할 만한 삶이어서가 아니다. 정해진 운명이, 사회가, 조직이 요구한 대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 내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끝없이 의식하며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특히 여성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운과 실수가 씨실과 날실처럼 엇갈려 직조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삶을 우리가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2호 2018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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