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너리 데이즈> 김려원, 행복해지는 연습
데뷔 4년차 김려원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2017년 B급 좀비 뮤지컬 <이블데드>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유독 개성 강한 배우로 가득했던 이 작품에서 김려원은 백치미 넘치는 셀리와 똘똘한 애니 1인 2역을 맡아 지지 않는 끼를 보여줬다. 올해는 <젊음의 행진>의 주인공 오영심 역으로 첫 대극장 주연에 도전했다. 2015년 공연에 조연 월숙 역으로 출연했을 당시 김려원의 실력을 눈여겨 본 연출이 그를 주인공으로 추천한 것이다. <오디너리 데이즈> 역시 김려원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공연 내내 요란법석을 떨며 따발총처럼 노래하는 뎁은 딱 봐도 무지막지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역할.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가창력과 짱짱한 성량을 뽐내는 김려원의 뎁을 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선 세 작품을 통해 김려원을 접한 나는 인터뷰를 준비하며 내심 시끌시끌하고 야심만만한 배우를 상상했다. 하지만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건 앳된 말투로 수줍게 웃는 김려원. 멀리 있는 미래보다 주어진 현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그의 이야기를 여기 옮긴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게 만든 작품은?
열아홉 살 때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보고 뮤지컬에 반했다. 당시 나는 회사에 소속된 가수 지망생이었다. 내가 원한 건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였지만, 회사에서는 날 연예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연애는 금지, 아르바이트는 지정된 곳에서만 해야 하고, 성형 수술 제안까지 받았다. 이게 과연 내가 행복해지는 길일까 고민이 되더라. 나에게는 목표를 이루는 것 못지않게 목표로 향하는 과정의 행복도 중요했다. 결국 회사를 나와 22살에 명지대학교 뮤지컬공연과에 들어갔다. 사실 그때까지도 내가 본 뮤지컬이라곤 <브로드웨이 42번가>와 <미스 사이공>이 다였다. 아는 게 없으니 무서워서 오디션도 못 봤다. 졸업하고 28살이 되어서야 <셜록 홈즈2: 블러디게임> 앙상블로 데뷔했다.
디지털 싱글 음원도 다수 발표했던데.
학교 교수님의 소개로 덜컥 녹음을 하게 됐는데, 하다 보니 다른 기회로 계속 이어지더라. 가요는 주로 슬픈 발라드를 불렀다. 그런데 뮤지컬 배우는 보통 성량이 크지 않나. 작년에 발라드 녹음을 하는데 스피커가 견디질 못해서 나 때문에 녹음실 스피커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앙상블 때도 합창을 하면 내 목소리만 들린다는 말을 듣곤 했다. 내가 힘이 센가 보다. (웃음)
<오디너리 데이즈>의 뎁과 김려원의 공통점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점. 뎁은 자신이 똑부러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수투성이인데, 나도 뎁처럼 덜렁거리고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다. 하나 더, 뎁이 대학원 논문을 쓰며 느낀 처절한 고통을 나 역시 경험한 바 있다. 논문에 대한 부담감에 휴학까지 했다가 재작년 <젊음의 행진>과 한국 주크박스 뮤지컬에 대한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커튼콜에서 읽어주는 쪽지의 문장 중 인상 깊었던 건?
그 쪽지 내용은 배우들이 직접 쓴 거다. 내가 쓴 건 ‘인생이란 끝없는 배움이다’ 그리고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자.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이 두 개다. 후자는 어느 책에서 읽은 문장인데, 내가 극 중 뎁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미지와 실제 성격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실제 나는 걱정이 많은 성격이다. 데뷔작 <셜록 홈즈2: 블러디게임>, 첫 대극장 주연작 <젊음의 행진> 모두 청심환 먹고 공연했다. (웃음) 근데 무대에서는 그렇게 안 보이나 보다. 예컨대 <그리스>에서 어떤 역할이 나와 어울릴까 물었을 때, 대부분이 리조나 마티를 꼽는다. 하지만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당연히 샌디라고 말한다. 걱정이 많다 보니 연습에 목을 매는 편이다. 쉬는 시간에도 계속 노래를 틀어놓고 연습하니까, 동료 배우들이 치를 떨며 다음부터 내가 하는 작품은 피하겠다고 하더라. (웃음) <오디너리 데이즈>는 송스루 뮤지컬인데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혼자 더 연습할 수 없어서 엄청 불안했다. 결국 첫 공연을 앞두고 또 청심환을 먹었다!
배우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덕목은?
배려. 무대에서 전달되어야 하는 핵심 이야기가 있는데, 주변에서 누군가 튀는 연기를 하면 관객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나. 결과적으로 그 배우는 인기를 얻겠지만, 그게 옳은 행동은 아닌 것 같다. 배려가 필요하다. 작품에 대한 배려,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 상대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살피고 소통해야 좋은 그림이 나오더라. 관객에 대한 배려는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한테는 수십 번 중 한 번의 공연이지만 관객에게는 단 한 번의 공연일 수 있으니 컨디션의 편차를 줄이려고 신경 쓴다.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주어진다면?
모두가 똑같은 선에서 출발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실력 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기회를 얻는 사회. 오디션에서 아무리 잘해 봤자 유명세에 따라 캐스팅이 결정되는 경우가 있다. 작품의 흥행이 배우의 유명세에 달려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속상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라. 안 알려진 배우는 배우가 아니라고. 나는 딱히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이 없는데, 작품을 하려면 유명해져야만 한다. 뮤지컬 배우라고 소개하면 TV에는 언제 나오냐고 묻는 분들도 있다. 난 방송에 나가고 싶어서 뮤지컬을 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 ‘뮤지컬 배우 출신의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슬프다.
다른 배우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쉴 때 뭐하세요? 배우라면 누구나 차기작에 대한 걱정을 갖고 살 것이다. 언제 다시 무대에 설지 모른 채 기약 없이 쉴 때, 다들 그 시기를 어떻게 잘 보내는지 궁금하다. 나는 작품이 없으면 쉽게 우울해진다. 그럴 때면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린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면 치유가 되더라. 신기한 건 내가 괴로움을 담아 그린 그림을 보고 다른 사람은 아름다움과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는 거다. 그래서 그림이 좋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2호 2018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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