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외롭고 사랑스러운 것들의 도시
재연 무대 디자인 (이은경 무대디자이너)
무대는 로봇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사람이 떠나버린 노후한 아파트, 그 안에 주인 없이 남겨진 로봇의 외로움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랐어요. 이를 위해 무대 위 연주자들의 공간도 각각 독립되어 존재하도록 만들었죠. 올리버와 클레어의 공간에는 커다란 창이 있어, 이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건물과 사람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느꼈을 고독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야 두 로봇이 각자 주인을 떠나보낸 후 처음으로 느끼는 따뜻한 감정이 더욱 살아날 것 같았거든요. 외따로 존재하는 두 로봇이 외로움으로 어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시각적 단서도 숨겨 놓았습니다. 종이컵 전화기의 실처럼 무대를 가로지르는 선을 통해서요.
또 한 가지 조심스레 담아내고자 한 것은 ‘미래 도시’라는 세계관입니다. 곡선 형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현재와는 약간 구별된 미래 정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대본에서 느껴지는 미래 도시는 아주 세련되고 번쩍거리는 모습은 아니었어요. 지금의 현실과 아주 동떨어져 있지도 않고요. 그렇기에 색감이나 질감은 낡고 클래식하게 처리하여, 불협화음이 섞여 묘한 음악을 들려주는 그들만의 공간을 표현했습니다.
재연 소품 디자인 (박현이 소품디자이너)
소품은 전체적으로 빈티지한 소재와 색감을 사용하여 아날로그 감성을 간직한 헬퍼봇의 생활을 좀 더 표현해 보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행 가방과 레코드 플레이어에 벨벳, 가죽, 오래된 철 위의 작화가 벗겨진 느낌을 더하는 식으로요. 언제나 제임스를 생각하며 살림을 꾸리는 올리버의 방에는 재즈가 떠오르는 황동색, 갈색, 와인색의 소품이 놓여 있습니다. 종이 향 혹은 커피 향을 닮은 소품들이죠. 반면 클레어와 만나 사용하는 소품은 가볍고 경쾌하게 디자인하였습니다. 올리버와 클레어가 함께 쓰는 우산은 빛이 반사되는 소재를 사용하여 둘의 만남에 반짝거림을 더했어요. 화분과 반딧불이 병도 가볍고 아련한 느낌입니다. 작고 아기자기한 것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레코드 앨범 디자인 (박천휴 작가)
제임스가 올리버에게 남긴 레코드 앨범 디자인은 제가 직접 했어요. 제임스가 올리버와 함께 살 때 조심스럽게 틀곤 했던, 그가 가장 아끼는 앨범인 ‘우린 왜 사랑했을까’라고 상상하며 만들었죠. 초연 당시 소품디자이너분이 따로 계셨지만, 저와 작곡가 윌이 예전부터 옛날 재즈 레코드 디자인을 좋아해서 직접 해보면 재밌겠다 싶었…으나, 공연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아 연습이 무척 바쁜 상황에 연습실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해야 했어요. 어쨌거나 의미 있고 즐거웠습니다. ‘더 길 브렌틀리 재즈 메신저스’란 이름은 저희가 영어 대본을 쓸 때 윌이 떠올린 그럴싸한 밴드 이름이에요. (1941년 암스테르담에서 녹음되었다고 가상으로 설정한) 뒷면의 곡 목록은 <어쩌면 해피엔딩> 데모 곡들의 영문 제목이고요. 하하. 디자인도 그 시절답게 단순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올리버는 제임스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 ‘우린 왜 사랑했을까’의 여러 버전 중 하나를 매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나다가, 결국에는 제임스가 가장 아끼는 바로 이 버전, 이 레코드판을 제임스로부터 물려받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2호 2018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