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우주연상, 데뷔 10주년, 첫 단독 콘서트. 드라마 속 주인공이 이런 큰 에피소드를 연달아 겪는다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코웃음 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인생 사건들은 10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최재림에게 지난 한 달 새 벌어진 일들이다. 자신이 마음먹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남자. 그가 나아가고 싶은 길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10년 전, 그리고 10년 후
오늘 인터뷰에 오기 전에 우연히 2009년 <렌트> 홍보 영상을 봤어요. 배우 생활을 막 시작할 때였으니까, 언젠가 이런 상을 받겠다는 목표 같은 게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요? 그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웃음) 모든 게 마냥 새롭기만 했죠. 제가 연습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꼭 다시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 팀에 저처럼 신인인 친구들이 많아서 다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 있었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 이후로도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배우로서 언제쯤 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상을 받고 싶단 생각도 특별히 안 했고요. 꼭 상을 받아야만 성공한 게 아니니까. 10년 넘게 꾸준히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번에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이란 큰 상을 받았잖아요. 뜻밖의 수상이었나요? 네,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트런치불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좀 특수한 역할이긴 하지만, <마틸다>는 워낙 아이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기대를 못 했죠. 그래서 노미네이트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사실만으로 만족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상을 받게 돼서 얼떨떨했죠. 그날 밤에도, 다음 날에도 실감이 안 났는데, 그러다 점점 제가 지나온 길의 분기점마다 저를 성장하게 해준 선생님들 생각이 났어요. 처음 성악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 대학 입시를 위해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 학교에 들어가서 만났던 선생님…. 배우는 어떻게 보면 종착점이 있는 직업이 아니잖아요. 이번 상은 제 앞에 놓인 먼 길을 잘 걸어가란 의미의 달콤한 격려를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상을 받고 나서 주위의 많은 축하를 받았을 텐데, 그중에서 특별히 인상적인 축하 인사가 있어요? 2013년인가, 아무튼 몇 년 전에 일주일짜리 여름 음악 캠프를 한 적이 있어요. 박칼린 선생님하고 김형석 작곡가님이 진행하신 건데, 전 뮤지컬 파트 인스트럭터로 참여했죠. 그런데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 중 두 명이 문자를 보내왔더라고요. “선생님, 소식 들었어요.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항상 응원합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 고마웠어요. 사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축하는 고맙긴 해도 일상에 가깝잖아요. 그런데 특정한 일로 만났다 연락이 뜸해진 사람들이 문득 그런 안부 문자를 보내면, 이 사람이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내 소식을 궁금해하는구나 싶어서 기분이 뭉클해요. 나는 그동안 연락을 못 했는데, 날 이렇게 잊지 않아주니 굉장히 미안하면서 그만큼 고맙죠.
<마틸다>를 본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최재림이란 배우가 자기가 하는 공연을 아끼는 마음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어요. 트런치불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까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나요? 즐길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이만큼 즐길 거라곤 생각 못 했죠. 주위 배우들이 저보고 맨날 그랬어요. 너무 즐기지 말고 연기를 해! (웃음) 트런치불은 제가 이전에 해보지 않은 성격의 독특한 캐릭터라 도전 의식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이것저것 시도할 수 있는 게 많았던 역할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아이들과 호흡을 맞춰봤는데 그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이들은 성인 배우들보다 한두 달 일찍 연습을 시작해서 저희가 합류했을 때 이미 대사와 노래, 동선까지 다 외운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연습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퍼즐의 빈자리에 저를 끼워 맞추는 작업 같았어요. 내가 어떤 모양의 퍼즐이 돼야 저 자리에 꼭 들어맞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죠. 아이들이 나랑 연기할 때 최대한 즐거울 수 있게 하자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다행히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나중에는 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더라고요.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당 트런치불인데! (웃음) 대기실에서도, 무대 위에서도 마음이 항상 따뜻했기 때문에 그게 사람들한테도 느껴졌던 게 아닐까 싶어요.
흔히 아이들과 작업하면 잃어버린 순수함을 떠올리게 된다는 말을 하잖아요. 혹시 다른 인상을 받은 게 있나요? 제가 이번 작업에서 제일 놀랐던 건, 아이들의 수행 능력이에요. 아이들이 이 모든 노래와 연기, 안무를 소화해 내는 모습 자체에 어마어마한 감동을 느꼈죠. 그리고 연습 때 아이들이 지닌 날것의 아이다움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도서관 책을 찢는 미스터 웜우드한테 화가 난 마틸다가 “우리 순간접착제 있어요?”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근데 연습실에서 그 장면을 연습할 때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순간적으로 접착제를 찾던 적이 있어요. 진짜 그걸 찾는 줄 알고요. 아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생생함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때 또 놀랐죠. 하지만 전 <마틸다>라는 작품을 통해 동심으로 돌아갔다기보다는 내가 이제 어른이 됐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마틸다> 속 아이들이 상상하는 어른과 실제 어른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는 걸 전 아니까요. 배우는 언제나 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번 공연을 하면서 그런 순수함을 잃어버린 세월이 길어졌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좀 서글펐다고 해야 하나.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 중간 어딘가에 있는 서글픔이 느껴졌던 순간이 몇 번 있었죠. (웃음)
작년 이맘때쯤 <킹키부츠> 롤라를 하게 됐을 때 인터뷰했던 거 기억해요? 제 생각엔 드래그퀸 롤라를 했기 때문에 여자 교장 트런치불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둘 다 적잖이 파격적인 역할이라 앞으로 또 어떤 변신을 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런 부담도 있어요? 제 생각에도 저한테 변신의 가능성을 열어준 시작점이 <킹키부츠>인 것 같아요. 롤라 이후에 트런치불을 만난 덕분에 관객들이 느낄 당혹스러움이 좀 중화되지 않았나 싶죠. (웃음) 돌이켜 보면 작년 초부터 올해 초까지 <킹키부츠>, <노트르담 드 파리>, <마틸다>, 이렇게 세 편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그 이상의 특별한 새로움을 찾으려 한다면 제 자신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제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작품이 저게 또다시 찾아온다면 너무 감사하겠지만 쉽진 않을 테니까요. 지난 일 년 동안 소중한 경험을 한 것에 감사하면서, 앞으로는 익숙함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새로움을 탐구해 봐야죠. 뭐, 달리 어떡하겠어요. (웃음)
자기 자신과 관객을 위한 자리
이번에 하는 단독 콘서트는 어떻게 준비하게 된 건가요. 단독 콘서트에 대한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했어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런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하고 싶다’, ‘해야지’, ‘하자’는 마음이 늘 있었죠. 특히 2016년하고 2018년에 감사하게도 일본에서 콘서트 제안을 받으면서 그런 마음이 더욱 커졌던 것 같아요. 두 번 다 5인조 밴드로 공연했는데, 한 번은 전자 악기를 뺀 어쿠스틱 버전이었거든요. 연주가 좋으면 저는 살짝 묻어가도 되더라고요. (웃음) 작은 규모의 밴드로도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한국에서도 시도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여러 이유들로 계속 미뤄지다 작년 초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왔는데, 마치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이 데뷔 10주년을 맞는 해에 상까지 받게 돼서 저도 되게 신기해요.
국내에서 첫 단독 콘서트이다 보니 이것만큼은 해낼 거라는 각오가 있을 것 같아요. 무조건, 퀄리티! 좋은 음악 구성과 좋은 사운드, 이 두 가지가 이번에 이뤄내고 싶은 메인 목표예요. 이번 콘서트의 주제가 ‘듣다’거든요. 관객분들이 듣고 싶은 노래와 관객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노래, 이런 몇 가지 테마로 구성된 세트리스트를 제가 ‘엄청 잘 불러서’ 좋은 음악으로 들려드리는 컨셉이에요. 단독 콘서트에서 노래는 당연히 잘 불러야 하는 거잖아요. 이번 콘서트를 위해서 정말 많은 분들이 나서 주셨는데, 연출은 박칼린 선생님이 해주실 거고, 편곡은 김성수 음악감독님이 작업 중이세요. 김성수 감독님과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하고 <에드거 앨런 포>를 같이 작업한 인연이 있는데,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연주자분들도 ‘네 콘서트인데 당연히 해줘야지’라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고요. 내가 인복이 참 많구나 이번에 다시 한 번 느꼈어요. 그만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죠. (웃음)
콘서트를 구성할 때는 관객 취향도 생각해 봐야 하잖아요. 관객들이 최재림에게 뭘 기대할지 고민해 봤어요? 일단, 얼마나 불러 제낄까? (웃음) 관객들이 저를 다행히도 노래를 잘하는 배우로 생각해 주시기 때문에 아무래도 얼마나 고난이도의 노래를 많이 할까 이런 기대를 많이 하실 것 같아요. 또는 엄청 새로운 무언가를 부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을 테고요. 그래서 최대한 관객이 기대하는 방향을 반영해 세트리스트를 짜려고 노력했어요. 제 자신도 즐기고, 관객분들도 즐길 수 있도록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음악에 집중하는 콘서트이긴 하지만, 비주얼적인 재미가 있으면 좋으니까 쇼적인 부분도 구상하고 있어요. 물론 최재림이 하는 거니까 대단한 퍼포먼스는 아닐 거예요. 예를 들면, <킹키부츠> 노래를 부르는 정도? 관객분들이 ‘맞아, 최재림이 저런 신나는 역할도 했지’ 떠올릴 수 있게요. 아시겠지만, 갑자기 댄스 타임을 하기엔 저의 무용 기능 레벨 자체가 낮기 때문에…. 이 콘서트가 지속돼서 다음에 ‘최재림을 보다’를 할 수 있다면 그때는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웃음)
세트리스트에 이 노래만큼은 내가 제일 잘 부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곡도 들어가 있겠죠? 아니, 이 노래는 내가 제일 잘 부른다는 말을 어떻게 해요. 그거 너무 민망한 발언인데! (웃음) 글쎄요, 뭐가 있지….
<넥스트 투 노멀>의 ‘I'm Alive’? 아, 그 곡은 다른 데서 많이 불러서 이번에는 뺐어요. 전체 구성상 어울리는 곳이 없기도 했고요. 지금 리스트 중에서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굳이 뽑자면, <에드거 앨런 포>의 ‘매의 날개’랑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Heaven On Their Minds’가 아닐까 싶어요. 관객분들이 제가 그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 주셨거든요. 콘서트 코너 중에 제 목소리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구성된 파트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여기서 부를 노래들을 조금 기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최재림을 듣다’라는 컨셉에 가장 맞는 코너라서요. 아! 이 코너에서 부를 <매디슨 카운티 다리>의 ‘It All Fades Away’가 잘 부를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곡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만하지만, 이 노래는 그냥 제 것 같아요. 항상 부를 때마다 스스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곡이라 관객분들께 꼭 한 번 들려드리고 싶었죠.
그럼 반대로 가장 도전적인 곡은 뭘까요? ‘Nessun Dorma’요.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칼리프 왕자의 대표 아리아인데, 전 이번에 록 버전으로 편곡해서 부를 예정이거든요. 오케스트라 악기 편성이 아니기도 하고 신선하게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클래식하게 시작했다가 록 사운드로 바뀌는 구성을 구상 중이에요. 3분 15초 정도 원곡의 길이를 두 배 정도 늘려서요. 솔직히 제 생각에 ‘Nessun Dorma’ 원곡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소리는 저한테 없다고 봐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성악 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연습했지만, 아쉽게도 이 소리는 안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성악적인 소리 중 최대한 베스트를 뽑아내 보려고요. 아마 이번 콘서트에서 저한테 제일 큰 숙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먼 훗날 돌아봤을 때 10주년이란 타이틀이 별거 아닐지 몰라도, 한길을 10년 동안 걸어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잖아요. 앞으로는 또 어떤 길을 걸어가고 싶나요. 게을리 살았던 때도 있고, 철이 없었던 때도 있고, 지금까지 많은 실수를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물론 커리어는 굉장히 잘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배우로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주위 사람들을 많이 고생시켰거든요. 제가 커리어를 잘 쌓을 수 있었던 이유겠죠. 앞으로도 활동하면서 여전히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주위 사람들이 마음고생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싶어요. 제가 작년 <킹키부츠> 인터뷰 때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나는데, 그런 면모가 아예 없다고 하면 너무 서글프니까 이제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문을 활짝 열고 싶다고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좀 더 인간이 돼보자는 마음이랄까. 아니,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제가 너무 이상한 사람 같네요. (웃음) 앞으로는 제 개인적인 삶 자체도 활기차고 생동감 넘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덧붙여서, 배우로서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드릴 시기가 오고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요. 이제는 소년보다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6호 2019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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