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임찬민, 밤바다의 별
빨간 머리 앤이 주인공인 뮤지컬 <앤ANNE>에서는 세 명의 배우가 성장 단계별로 앤을 연기한다. 그중 임찬민이 맡은 역할은 잘 알려지지 않은 앤의 성숙한 모습을 그린 앤3. 아버지 같던 매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절망하지 않고 저 길모퉁이 너머 좋은 일을 상상할 줄 아는 앤3의 씩씩함은 많은 관객에게 용기를 전해 주었다. 이후에도 임찬민은 <전설의 리틀 농구단>에서 똑 부러진 구청 직원 미숙을 연기해 힘 있는 목소리와 강단 있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에는 무릎 부상을 이겨내고 <신흥무관학교>의 독립투사 혜란을 맡아 한국뮤지컬어워즈 신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배우로서 큰 위기를 맞았던 그해 ‘절망이 밀려와도 희망을 붙잡고 절대 놓지 마라, 그럼 절망이 오다가도 도망칠 것이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버텼다는 임찬민. 그런 그가 이번에는 거친 파도 위를 누비는 해적으로 변신한다. 깜깜한 밤바다에서도 별을 올려다보며 항해를 이어가는 임찬민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 될 수도 있으리라.
배우를 꿈꾸게 만든 특정한 작품이 있나. 어릴 적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굉장히 좋아했다. <미녀와 야수>의 벨은 다른 디즈니 여주인공과 달리 왕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린 나는 벨처럼 용감하고 노래 잘하는 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에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고 ‘이게 내 길이구나’ 느꼈다. 그 뒤로도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결국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원에 다니며 뮤지컬배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른 배우들에 비해 시작이 늦은 편이지만, 나의 속도에 맞춰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데뷔작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데뷔작은 넌버벌 퍼포먼스 <비밥>이었다. 대사는 없어도 가장 기본적인 소리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나중에 대사 연기도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연기를 전공하지 않아 데뷔작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우겠다는 각오로 임했기 때문에 2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참여했다. 그 사이 중국 40여 개 도시에 투어 공연을 다녀오는 흔치 않은 경험도 했다. 사실 내가 중문과 출신이라 중국어도 꽤 한다. 중국 공연 관계자 여러분 연락 주세요!
2017년 출연한 첫 뮤지컬 <앤ANNE>에는 어떻게 참여했나? 서른 살이 되던 해,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비밥>에서 밝고 쾌활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두 분이 돌아가신 뒤로 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밝은 연기를 못하겠더라. 이런 사정을 들은 류성 연출님이 내게 연극 <리어 누아르>에서 리어왕의 딸 리건 역을 맡겨주셨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센 캐릭터였다. 그 공연을 본 오세혁 연출님의 눈에 띄어 <앤ANNE>과 <전설의 리틀 농구단>에 출연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전설의 리틀 농구단>을 본 이희준 작가님과 박정아 작곡가님이 <신흥무관학교>의 혜란 역을 맡겨주시는 등 좋은 인연이 좋은 기회로 이어졌다.
뮤지컬배우 중 9할은 못해 봤을 경험이 있다면? <신흥무관학교> 연습 도중 무릎 인대가 파열되었다. 하차를 고려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서울 공연 중반까지 함께한 뒤, 수술과 재활 치료를 받고 지방 공연에 다시 합류했다. 그만한 부상을 입고 나처럼 빨리 복귀한 사람은 없다고 하더라. 아이처럼 걷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던 그 시기, 두렵고 힘들었지만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이희준 작가님과 박정아 작곡가님도 나를 많이 응원해 주셨는데, 그때 내가 보여드린 투지 때문에 <해적>이란 작품도 맡겨주신 것 같다.
<해적>에서 남녀 1인2역을 어떻게 연기할 생각인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접근하고 있다.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사와 가사 속에 담겨 있는 각 인물의 성격 차이를 표현하려 한다. 두 인물과 나의 접점을 찾는 데서 출발했다. 루이스는 섬세함과 상상력, 열린 마인드가 나와 닮았다. 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와 할 말은 하는 성격이 나와 닮았다.
역대 출연작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나 가사를 꼽는다면? <신흥무관학교>에서 혜란이 동규에게 ‘많이 먹고 빨리 나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내가 마지막 서울 공연을 마친 날 오진영 선배님이 나를 안아주며 ‘많이 먹고 빨리 나아’라고 해주셨다. 감사하고 따뜻한 기억이다. <해적>에서는 ‘스텔라 마리스’라는 곡을 좋아한다. 스텔라 마리스는 라틴어로 ‘바다의 별’이라는 뜻이다. ‘밤바다의 별, 나의 나침반, 나의 수호천사’라는 가사를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스텔라 마리스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뮤지컬 속 캐릭터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면? 그동안 내가 연기한 캐릭터를 모두 초대해 홈파티를 열고 싶다. 아마 그들도 나에게 하고픈 말이 많겠지? ‘넌 나를 왜 그렇게 연기했니? 그때 좀 더 피치를 올렸어야지!’
앞으로 뮤지컬에서 맡고 싶은 꿈의 배역은? <위키드>의 글린다. 뮤지컬을 공부할 때부터 ‘이건 그냥 난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캐릭터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클레어에도 도전하고 싶다. 클레어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회의적이면서도 반딧불을 쫓아다니는 몽상가적인 면을 지닌 캐릭터다. 로봇이지만 인간의 미묘하고 복잡한 양가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끌린다.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주어진다면? 일회용 빨대를 없애고 싶다. 버려진 빨대가 콧구멍에 꽂혀 고통스러워하는 바다거북의 영상을 본 뒤로 일회용 빨대를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늘 텀블러와 실리콘 빨대를 들고 다닌다. 또 일회용 컵 홀더 대신 천으로 만든 컵 홀더를 사용하고 있다.
당신에게 완벽한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고 큰 부상을 겪은 뒤에 내가 깨달은 점은, 눈을 뜨고 만나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는 거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사람과 사람이 눈을 마주 보고, 손을 마주 잡고 얘기할 수 있는 매 순간이 귀하고 행복하다.
당신의 인생철학은? 진짜 슬플 때는 오히려 웃음이 나고, 진짜 기쁠 때는 오히려 눈물이 나는 게 인생이다. 연기를 할 때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 ‘배우가 너무 울면 관객이 울 틈이 없다’는 디렉션을 종종 듣는데, 실제 삶에서도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지 않고 오히려 남이 대신 울어주더라. 반면 신인상 후보에 올랐을 때는 너무나 기뻤지만 담담한 표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웃음에 속으면 안 되고 눈물에 속으면 안 된다. 진짜는 모르는 거니까. 그게 나의 인생철학이자 연기 철학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6호 2019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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