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아더>?, 스타일 살리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킹아더’와 알앤디웍스
올해 대형 뮤지컬의 라인업을 보면서 아더 왕의 전설을 다룬 신작이 두 편이나 공연된다는 사실에 놀랬더랬다. 아더 왕의 이야기가 우리한테 그렇게 매혹적인 이야기였나? 켈트족의 신화이자 중세 서사시인 이 멀고도 오래된 이야기는 이제 게임이나 영화의 판타지에 더 어울려 보인다. 대중 콘텐츠에 등장하는 모든 원형적 서사는 매체의 기술력과 장르의 상상력이 뒷받침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 게임과 영화가 첨단 기술을 통해 재현하는 판타지의 실사를 떠올려보시라. 원형적인 서사일수록 현대적인 형식이 잘 어울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뮤지컬에서도 마찬가지다. 제한된 공간 안에 측정할 수 없는 에너지와 제약받지 않는 상상력이 공존할 때 공연은 영화나 게임과는 다른 또 다른 판타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킹아더>를 알앤디웍스에서 만든다고 했을 때 한편으로 의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마, 돈 크라이>와 <더 데빌>처럼 지금껏 알앤디웍스가 선보였던 작품은 소재와 형식에서 주류와는 다른 개성을 가진 공연들이 많았더랬다. 주류의 문법이라기보다는 마니아의 취향이 먼저 연상되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서사의 완성도보다는 공연의 에너지가 돋보였던 경우가 많았던 거다. 그런 알앤디웍스에서 언뜻 주류 대형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킹아더>를 만든다고? 하지만 이 작품이 프랑스 뮤지컬임을 생각하면 이내 고개가 끄덕여진다. 노래와 퍼포먼스를 각각의 독립된 영역으로 나눈 프랑스 뮤지컬의 고유한 형식은 공연성이 도드라지는 작품을 선호하는 알앤디웍스의 경향과 잘 어울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미 대극장에서 <록키호러쇼>처럼 스타일 분명한 작품을 올려본 경험이 있으니, 이렇게 보자면 <킹아더>는 예외가 아닌 연장선에 가까운 작품인 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어떤 맥락의 연장선에 있는가이다. 대극장 규모의 외국 작품인데도 어쩐지 <킹아더>는 라이선스 뮤지컬의 계보보다는 창작뮤지컬의 맥락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록키호러쇼>는 이미 고전 뮤지컬 반열에 오른 작품이기에 알앤디웍스의 스타일보다는 작품의 유명세가 관객에게 더 각인된 경우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새로운 무대화(화려함이 새로움은 아니니까!)를 시도하기보다는 컬트 뮤지컬의 고전적 코드(나도 춤추고 비 맞고 빵 던진다!)를 대규모로 재현 반복하는 데 집중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킹아더>는 프랑스 뮤지컬이라는 사실이나 음악이 좋다는 소문 등 소소한 정보로만 알려져 있는, 관객에게는 생소한 작품이다. 유명한 작품에는 확인하는 재미가 있어 그래도 괜찮지만 새로운 작품에는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법. <킹아더>는 작품의 이름값이 아닌 공연의 만듦새로, 알앤디웍스의 스타일을 스스로 확인하고 관객에게는 각인시키는 작품이어야 하는 거다. 대극장 규모에서 알앤디웍스 고유의 스타일을 드러내기.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애매모호한 틀거지
이 도전에 일관성은 분명히 있다. 오루피나와 오필영 등 알앤디웍스의 작업에서 여러 번 호흡을 맞춘 창작진들이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공연의 화술은 <킹아더>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니 말이다. 연출가 오루피나의 감각적인 장면 만들기도 여전하고, 무대디자이너 오필영의 세련된 공간 만들기도 여전하다. 유독 알앤디웍스의 작업에서 오필영은, 다른 제작사의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하고 풍성한 무대와는 달리, 물리적으로는 공간을 비우고 상징적인 의미를 이미지화하는 무대를 자주 선보였더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킹아더>의 무대는 설명하지도 재현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대형 뮤지컬의 전형적인 무대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간결한 무대는 이 작품이 서사의 재현보다는 시청각적 퍼포먼스에 집중하리라는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런 일관성이 대극장 공연으로 확대됐을 때 그동안은 공연의 에너지로 메워졌거나 작품의 이름값으로 충당됐던 여러 지점의 빈틈이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데 있다. 일단 이야기부터가 그렇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극적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에피소드로 분절되지도 않는다. 아더를 고통을 감내하며 성장해 나가는 비극적 영웅으로 설정한 것을 보자면 서사는 극적인 논리로 흘러가야 맞다. 하지만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 아더는 짧게 갈등하고 쉽게 용서한다. 여기에 긴장이 생길 리는 만무하고, 갈등이 없는 이야기가 극을 이룰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애초부터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분절하려 한 걸까? 극 초반의 몇몇 장면에서는 노래로 장면이 분절되어 이야기는 장면을 담아내기 위한 틀거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더와 대결하는 악당이 등장하는 지점에서는 또다시 인물과 서사가 전형적인 극의 모양새로 흘러가 버리니, 극으로 보기에는 논리가 헐겁고 에피소드로 보기에는 감정이 넘쳐난다. 이야기는 극도 아니고 틀도 아닌 채 애매모호하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반구형의 테두리로 공간을 감싼 무대는 전면을 빈 공간으로 열어놓을 뿐 아니라 높이를 활용할 수 있게 계단을 심어놓았다. 퍼포먼스를 위해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모두 동원한 셈이다. 하지만 너무 가팔라서인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불안하고, 너무 깊어서인지 무대 위에 올라간 배우는 관객의 시야에서 꽤나 멀찍하다. 공간의 전면은 열어놓았지만 가끔씩 활용되는 대소도구에 배우가 가려질 때가 많고, 빈번하게 펼쳐지는 영상은 상징적인 무대가 무색하게끔 설명적이다. 무대에 높이와 넓이를 설정한 것은 퍼포먼스의 공간을 수평에서 수직으로 확장한 것일 텐데 이 작품에서 계단으로 설계된 수직적 공간은 그야말로 오르내리는 기능 외에는 쓸모가 없다. 넓고 깊고 높게 공간을 만들었지만 기능적으로나 상징적으로 활용도가 낮은 것이다. 빈번한 영상의 움직임에 오히려 반구형의 무대가 화면을 가리는 것같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공간은 확보했지만 퍼포먼스에는 적합하지 않은 무대 또한 애매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알앤디웍스가 찾은 성배
이 작품을 보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은 이거였다. 이 작품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거지? 프랑스 뮤지컬답게 노래와 퍼포먼스의 공연성에 집중하려는 걸까? 아니면 이야기에 맞는 판타지를 구현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보기엔 이 작품의 장면은 노래와 안무에서 자주 평범해진다. 물론 고음이 많고 음역의 진폭이 넓은 음악은 전문 무용수가 등장해 애크러배틱과 현대무용을 선보이는 장면에서 임팩트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 전체를 놓고 보자면, 아무리 현대적인 감각을 집어넣으려 했다 해도, 이 작품의 안무는 대극장 뮤지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군무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가장 멋있어야 할 원탁의 기사들의 춤은 지극히 평범해서 친근할 지경이다. 사방을 감싼 벽면의 수직 공간은 그저 배경일 뿐 프랑스 뮤지컬의 퍼포먼스가 비어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의 퍼포먼스는 주어진 무대 전면에 집중되어 있어서 관객을 압도하는 힘을 발휘하기엔 여러모로 역부족이다. 그러는 사이 이 작품의 중심이었을 음악은 특별히 부각될 기회를 자주 놓치고 만다. 이 작품에서 음악은 듣는 것이자 보는 것이어야 하건만.
배우들의 연기의 높낮이가 각각 다른 것이나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일관되지 않은 것도 결국은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한지상의 아더는 내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리사의 모르간은 외면을 만화적으로 과장하는 식이다. 전체적으로 주인공들의 의상과 화술은 사극 뮤지컬의 분위기인데 악당들의 모양새는 게임 속 캐릭터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불균형을 판타지의 특성이라고 말하진 말길. 영상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조명이 ‘열일’한다고 해서 판타지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 말이다. <킹아더>라는 작품으로 보자면 아쉬움이 한가득하다. 하지만 알앤디웍스가 추구한 공연성의 빈틈을 확대경처럼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는 공연이다. 개성처럼 보였던 지점이 실은 애매모호함이었다는 사실. 어쩌면 이것이 찾아야 할 성배였는지도 모르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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