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낯선 우주에서 펼쳐지는 친숙한 가족 이야기
<로빈>은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살아가는 과학자 로빈과 딸 루나, 로봇 레온의 이야기다. 10년 만의 지구 귀환을 앞두고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빈의 선택을 통해 가족의 사랑을 전한다. 본지의 뮤지컬 평론가 양성 프로그램 ‘더뮤지컬 리뷰어’ 출신 네 명이 공연을 관람한 뒤 이야기를 나누었다.
*_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참여자 이름은 뮤지컬 캐릭터로 기재했으며, 리뷰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주 벙커여야만 하는 이유
클레어_ 몇 년 전부터 창작뮤지컬은 주로 어두운 분위기를 띠는 작품이 대다수였잖아. 그런데 <로빈>은 건강하고 따듯한 이야기라서 반가웠어. 드물게 중년의 아빠가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하고. 중소극장 뮤지컬 가운데 가족 단위로 볼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은데 이 작품은 그럴 가능성이 보여.
스위니_ 좋은 가족 뮤지컬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부녀의 갈등과 화해 과정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질 필요가 있다고 봐. 지금처럼 방에 들어오지 말라는 실랑이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갈등이 고조되기 힘들어. 또 루나가 아빠에게 다시 마음을 열게 되는 계기가 뚜렷하지 않아 혼자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라피키_ 낭만적인 딸과 이성적인 아버지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 겨우 연필에 대한 견해차라니! 우주를 배경으로 삼은 만큼 SF적인 상상력을 기대했는데 그런 요소가 잘 드러나지 않았어.
롤라_ 두 사람이 10년 동안 우주 벙커에서 생활했다는 설정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게 아쉬워. 이들은 10년 동안 자가격리를 한 셈이잖아.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여도 그렇게 오랫동안 한 공간에 갇혀 살면 서로의 숨소리조차 짜증스러워질 거야. 극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갈등이 있을 텐데, 이 작품은 부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갈등에만 초점을 맞추니까 우주 벙커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를 모르겠어.
클레어_ 희망적이고 따듯한 분위기를 살리려고 한 게 이 작품의 강점이자 약점이 된 것 같아. 설정상 필연적으로 어두워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무대 세트나 음악은 밝고 아기자기해. 또 중간중간 수다쟁이 로봇 레온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환기하는데, 귀여운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부녀의 갈등이 깊어질 틈이 없었어.
라피키_ <로빈>은 개막에 앞서 미리 공개한 음악이 호평을 받으며 기대감을 높였어. 그런데 막상 드라마에 음악이 잘 녹아들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 예컨대 ‘초콜릿 케이크’라는 뮤지컬 넘버는 귀여운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가 돋보이지만, 생뚱맞은 타이밍에 튀어나오는 데다 이야기 진행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아.
롤라_ 뮤지컬은 음악이 듣기 좋아도 스토리와 연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 같아. 며칠 전에 <레 미제라블: 뮤지컬 콘서트> 실황을 봤는데 새삼 뮤지컬 음악이란 이런 거구나 싶더라. 리프라이즈를 활용해 동떨어진 장면 사이의 맥락을 드러내는 걸 듣고 감탄했어. 오프닝 넘버로 장 발장의 긴 과거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라이선스 작품인 <넥스트 투 노멀>에서도 오프닝 넘버를 통해 가족이 처한 상황과 구성원들의 성격을 단번에 전달하지. <로빈>에도 지난 10년간 이들이 우주에서 얼마나 답답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요약하여 전달하는 음악이 있었다면 마지막 7일의 이야기가 더 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아빠의 사랑! 딸의 성장?
라피키_ 나는 극중극 역할을 하는 루나의 소설이 공연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의아했어. 소설 속 새가 솔라에게 날개를 주는 것처럼 로빈 역시 루나의 지구 송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할 것 같은데, 어차피 곧 죽을 로빈이 자기를 복제한다고 해서 잃을 건 없잖아? 루나에게 빛을 보여주기 위해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럼 로빈은 루나를 위해 뭘 희생한 거지 싶더라.
스위니_ 루나가 행복하게 지구로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은 기꺼이 잊히기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루나가 진실을 모르는 게 과연 최선일까 의문이야. 극 중에서 로빈은 루나에게 가재가 탈피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에 대해 이야기하잖아. 그런데 정작 루나는 진실을 마주하고 홀로 서는 고통을 겪지 않아.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복제인간 아빠들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남지. 소설 내용대로라면 루나가 아빠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결말은 눈물겨운 부성애를 보여주는 데 그쳤어.
라피키_ 딸 모르게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며 살아남는 아빠라니, 난 어쩐지 좀 오싹했어. 차라리 루나가 로빈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지만, 결국 10년간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준 그를 아빠로 인정하는 이야기였다면 감동적이었을 것 같아.
클레어_ 마지막에 지구에 돌아온 루나가 ‘아빠, 눈 처음 봐?’라고 묻잖아. 진짜 아빠라면 눈을 처음 볼 리 없는데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루나는 이미 아빠가 복제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암시 아닐까?
인간의 감정을 품은 인간 아닌 존재들
클레어_ SF는 익숙한 주제를 작가가 구축한 특수한 세계관 안에 가져다 놓고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야. 이때 중요한 건 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 세계관 안에서는 논리가 분명해야 한다는 건데, <로빈>은 기본적인 세계관이 정밀하지 못해서 몰입이 힘들었어. 작품 속에 묘사되는 복제인간이 인공지능을 갖춘 안드로이드에 가까운 데다, 아무리 천재 과학자라도 자원이 부족한 우주 벙커에서 일주일 만에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져.
스위니_ 이 작품은 복제인간을 통해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복제인간이 진짜 로빈처럼 루나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작품은 그 답으로 ‘기억’을 제시해. 같은 기억을 지니면 같은 감정이 피어난다는 거지. 하지만 로빈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한 번의 깨달음으로 나아가. 누군가의 기억을 복제해 만들어졌다 해도 그 이후 자신만의 기억을 쌓으면 결국 다른 존재가 되는 거라고. 그런데 이 깨달음이 극에서 어떤 전환점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어. 결국 그는 원조 로빈이 프로그래밍한 대로 또다시 자기를 복제하잖아. 자기 의지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는데.
클레어_ 핵심은 로빈이 자신이 복제인간임을 알게 된 뒤에도 루나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거 아닐까. 우주에서 루나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토대로 한 사랑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감정임을 깨달은 거지. 그래서 두 번째로 만든 복제인간에게는 그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은 것 같아. 두 번째 복제인간은 루나가 아빠에게 선물한 소설을 우주 벙커에 남겨놓고 떠나잖아. 그건 이 선물을 받는 사람이 이전까지 루나와 함께해 온 로빈이며, 자신은 그와 별개의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지.
스위니_ 나는 로빈의 깨달음이 로봇 레온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쉬워. 레온은 ‘감정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도 감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잖아. 로봇 또한 고유의 기억과 감정을 지닌 독립 개체라는 각성이 이어졌다면, 나중에 로빈이 레온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았을 거야.
롤라_ 며칠 만에 간단히 복제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에게 강제로 기억을 주입해 타인의 대체품으로 살게 한다는 게 생명 윤리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공연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더라. 물론 이 작품은 복제인간이라는 소재를 부성애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을 뿐 윤리적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진 않았지만 말이야.
스위니_ <어쩌면 해피엔딩>을 시작으로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이토록 보통의>, <로빈>까지 안드로이드나 복제인간을 소재로 한 창작뮤지컬이 연달아 등장했어. 뮤지컬과 SF의 만남은 신선해서 흥미롭지만 한정된 소재에만 관심이 쏠리는 건 아쉬워. SF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르이니 앞으로 더 다양하고 기발한 작품이 탄생하기를 바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1호 2020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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