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홈> 속의 비유와 은유들
나는 늘 비상을 행했었다.
날아가는 여성으로서,
나는 대지와 바다로부터 멀리 날아갔다.
-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뮤지컬 <펀홈>의 원작은 ‘벡델테스트’로 잘 알려진 앨리슨 벡델의 동명 그래픽 노블로, 이 작품은 일곱 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다. 챕터마다 앨리슨 벡델이 생각하는 주제에 맞는 영문학 작품들에서 따온 제목이 붙어 있다. 국내에 출간된 움직씨 출판사(번역 이현)의 『펀홈』은 친절하게 각 챕터 제목이 어느 작품에서 나온 것인지 부제로 명시해 독자의 수고를 크게 덜어준다. 이번 글에서는 위의 작품들 가운데 뮤지컬에서 중요하게 등장했던 몇 가지를 들여다보려 한다.
1장 먼 옛날의 아버지, 고대의 장인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2장 행복한 죽음
알베르 카뮈의 『행복한 죽음』, 『시시포스 신화』
3장 오랜 참사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4장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장 죽음의 카나리아색 마차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삽화
6장 이상적인 남편
오스카 와일드의 『정직함의 중요성』
7장 안티 히어로의 여정
호머의 『오디세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케이트 밀레트의 『성 정치학』
살아남은 쪽은 이카루스였다
주인공 앨리슨의 아버지 브루스는 다이달로스다. 쓰레기에서 금을 만들고 낡은 천 조각을 수선해서 다마스크 린넨으로 변신시킨다. 어린 앨리슨에게 아버지는 쓰레기 속에서 금을 찾아내는 연금술사다. 다만 그가 오매불망 닦아 광을 낸 것은 진짜 금이 아니었을 뿐. 그가 찾아낸 금이 진짜가 아니었듯이 그의 인생도 그러했다. 그는 날아오르기 위해 신중하게 날개를 이어 붙였고 딸인 앨리슨에게도 같은 날개를 씌워주려 했다. 신화에서 추락하는 쪽은 허황된 꿈을 꾼 이카루스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앨리슨이 브루스를 발판 삼아 도약한다. 브루스는 흩어진 깃털과 함께 바다로 추락하고 앨리슨은 비상한다. 앨리슨이 비상하여 날아간 곳이 태양처럼 찬란한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앨리슨은 그의 현실에 안착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진짜 인생으로. 아버지 세대 게이들의 목표가 생존 그 자체였다면, 앨리슨의 세대는 아버지의 세대를 박차고 그들의 삶을 주저 없이 드러내고 다름 자체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다. 아버지인 브루스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딸의 인생 앞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뮤지컬 초반 어린 앨리슨은 아버지의 발 위에서 비행기 놀이를 하며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다고 노래한다. 이 장면은 원작 그래픽 노블의 첫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이기도 하다. 뮤지컬에서는 첫 장면을 통해 앨리슨과 브루스의 상반된 듯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들은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들이 그렇듯이 무섭도록 닮았고 한편으로는 전혀 달랐다. 자신이 아버지를 추락시키고 대신 날아오른 이카루스라는 생각은 앨리슨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마침내 이 작품을 그리게 만들었으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두꺼비 토드의 연노란 마차
케네스 그레이엄의 소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는 토드라는 고집쟁이 두꺼비가 등장한다. 여러 판본이 있지만 만화가답게 앨리슨 벡델은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가 삽화를 그린 판본을 명시한다. 이 삽화 속의 노란 마차 앞의 두꺼비는 놀랍게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서 브루스를 연기했던 마이클 세베리스와 닮았다. 토드는 부자에 독선적이고 운전에 소질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노란 마치를 운전하다가 새롭고 멋진 자동차와 사고를 일으킨 후 그 차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앨리슨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집은 바로 그 토드가 버린 연노란 마차와도 같았다. 브루스는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화려한 집이었지만 이제는 폐가가 되다시피 한 거대한 집을 사들여 자기 손으로 수리한다. 집을 꾸미는 대부분의 것들은 벼룩시장에 나온 물건들이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보물처럼 변신시키고 그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그리고 제자리에 가구나 장식품처럼 자기 역할을 해야 하는 것들 가운데는 아내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앨리슨은 자신이 가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며 자란다. 아버지는 <원더풀 라이프>라는 고전 영화의 제임스 스튜어트처럼 집을 꾸미고 싶어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과 달리 현실의 아버지는 짜증도 잘 내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로지 집과 집기에만 쏟아붓는 아버지의 열정이 어쩌다가 앨리슨에게 옮겨올 때는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입히고 머리에 핀을 꽂게 하고 붉은 에나멜 구두를 신길 때이다. 브루스는 자신의 어릴 때를 연상케 하는 앨리슨을 보며 앨리슨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앨리슨 자신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꽁꽁 감추려 든다. 앨리슨의 첫사랑인 조안이 그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입이 딱 벌어진 모습에서 브루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확인하며 찰나의 내적 댄스를 추었을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찾은 정체성
끝까지 읽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챕터에서 여자아이들은 아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소설 속 아이들이 발목을 드러냈던 치마를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되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꽁꽁 싸매 몸을 가두기 시작할 때, 앨리슨은 인생 처음으로 불온한 존재를 목격한다. 그래픽 노블에서 세 쪽에 걸쳐 묘사된 그 불온한 존재는 앨리슨이 처음으로 목격한 부치 레즈비언의 모습이다. 뮤지컬이 소설이나 만화, 영화 등의 다른 매체를 원작으로 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할 부분이 취사선택이라고 할 때, 이 장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래 ‘Ring of Keys’는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Wouldn't It Be Lovely?’나 ‘The Rain in Spain’ 만큼이나 강렬하게 만들어진 장면이다. 어린 앨리슨은 아버지와 함께 갔던 동네 식당에서 짧은 머리 스타일에 카고 팬츠와 워커 차림을 하고 허리에는 절렁이는 열쇠 꾸러미를 달고 들어선 여성 택배 배달원을 보며 가슴이 뛴다. 자신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기보다 차라리 멋지다고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정정하며 넋을 잃은 앨리슨을 브루스가 바라본다. ‘너도 저렇게 되고 싶니?’ 하고 다그치던 그래픽 노블 속의 대사는 오프브로드웨이까지 남아 있다가 브로드웨이로 오면서 사라졌다. 대신, 보고도 못 본 체하는 복잡한 심정의 아버지가 남았다. 그가 아무리 눌러도 앨리슨의 정체성은 팝콘처럼 냄비 밖으로 한가득 튀어나온다.
뮤지컬 <펀홈>의 주인공은 앨리슨과 브루스다. 두 사람은 똑같았고 또 전혀 달랐다. 장의사이자 영어 선생이었던 그는 딸의 정체성을 꼭꼭 숨겨두면서도 딸이 언젠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피츠제럴드로부터 콜레트까지 다양한 영문학 작품들을 읽게 하고 토론을 나눴다. 브루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작가 피츠제럴드와 같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다. 뮤지컬 <펀홈>은 난해할 수 있다. 세간의 도덕과도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부제는 희비극이다. 대부분 가족들의 관계가 그렇듯이, 인생이 그렇듯이.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2호 2020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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