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 액터뮤지션> 홍륜희
예상했던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호흡과 방식으로 무대 위 다양한 인물을 그려냈던 홍윤희가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 무대에서 젠더프리 역할에 도전한다. 홍륜희이기에 예상할 수 있지만, 동시에 홍륜희이기에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을 선보이기 위해.
낯설고 흥미로운 만남
이번에 참여하는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이하 <미드나잇>)은 젠더프리 캐스팅에 악기를 연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작품과 다른 결의 작품이에요. 어떤 매력을 느꼈어요?
요즘 소극장가에서는 창작뮤지컬이 대세라 오히려 라이선스 뮤지컬을 만나기가 어려워요. 흔히 볼 수 없는 소극장 라이선스 뮤지컬이라는 점이 특별했죠. 구성이 탄탄한 작품이라 재미있게 공연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예전 인터뷰에서도 “뮤지컬의 매력은 정해진 약속 안에서 자유롭게 연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어떤 작품을 하면서 처음 그런 재미를 느꼈나요?
2012년 <왕세자 실종사건>을 하면서 정해진 틀 안에서 자유로운 캐릭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저 스스로 그걸 무척 즐기고요. 저는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애드리브를 해야 하는 상황이 제일 무서워요. <미드나잇>은 음악과 대사 안에 큐사인이 들어있어요. 그 약속을 하나라도 놓치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버려요. 긴 대사를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약속을 계속 신경 써야 해요. 예민해지는 일이지만, 정말 재미있어요. 모든 게 잘 맞아떨어졌을 때의 희열이 대단하거든요.
<미드나잇>으로 젠더프리 역할에 처음 도전하게 되었어요. 비지터 역을 제안받았을 때 어땠어요?
이전에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곧바로 하겠다는 말은 안 나왔어요. 왜냐하면 저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고 비지터 역을 제안하셨는지 알 것 같아서요. 기자님은 ‘홍륜희’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요? (강하고 센 이미지!) 아마 홍륜희가 비지터를 한다고 했을 때 상상하는 이미지도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솔직히 제작사나 관객이 기대하고, 사랑하는 ‘홍륜희’를 보여주는 건 제가 가장 잘하는 거예요. 근데 배우로서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거든요. 그래서 출연을 고민하다가 작품도, 인물도 매력적이라 마음을 굳혔죠. 기존의 홍륜희 이미지를 다 버릴 수는 없겠지만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홍륜희만의 색다른 비지터를 기대해도 될까요?
어떻게 하면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지 저도 찾아가는 중이에요. 연습하면서 굉장히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비밀경찰이어도 각이 잡혀있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친절한 톤으로 말해보기도 하고, 제가 말하기 편한 단어로 바꿔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연습할수록 이 작품은 대본에 충실해야겠더라고요. 토씨 하나에도 뉘앙스가 크게 달라지거든요. 장면에 따라 반말, 존댓말을 다르게 쓰는 이유가 있고요. 비밀경찰 특유의 절도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게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가서 대본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러면서 어떻게 홍륜희 비지터에 새로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죠.
아무래도 비지터가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점에서 연기하기에 더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배역을 맡으면, 그 인물의 과거부터 꼼꼼하게 그려봐요. 예를 들어 <명동 로망스>의 마담이라면 마담이 태어나고 살았던 시대를 공부해요. 그걸 바탕으로 대본에 담기지 않은 인물의 서사를 만들어요.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제가 맡은 역할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써보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 인물에 이입해서 연기하기가 쉬워지거든요. 그런데 비지터는 초월적인 존재라 인물의 히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없더라고요. 지금까지 제가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해야 하니까 어려웠어요. 비지터는 배우의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보일 수 있어요. 저는 ‘의심’을 비지터의 핵심 키워드로 잡았어요. 비지터의 한마디에 맨과 우먼이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잖아요. 그 점을 잘 드러내 보려고요.
이번 공연은 <미드나잇> 두 가지 버전 중에 액터뮤지션 버전이에요. 노래와 연기 외에 기타 연주를 해야 하는데 준비는 잘되고 있나요?
이 작품을 처음 본 날 남민우 배우가 비지터를 연기했어요. 너무 편하게 기타를 치길래 연주가 쉬운 줄 알았어요. 저 정도면 연습해서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완전히 속았지 뭐예요. 알고 보니 남민우 배우가 기타를 엄청 잘 치는 거였더라고요. (웃음) 공연이 시작되면 비지터가 홀로 등장해서 기타를 친 다음 무반주로 노래해요. 그 장면을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돼요! 연습할 때도 1막 1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습해요. 기타를 뛰어나게 치는 건 바라지 않고 실수만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습하고 있어요.
첫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대가 큰가요? 아니면 걱정이 앞서나요?
아직까지는 기대가 30퍼센트, 걱정이 70퍼센트예요.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제가 풀어야 할 숙제를 만나는데, 이 작품은 유독 숙제가 많아서 조금 걱정이에요. 하지만 저는 무대에 오르면 힘이 나는 사람이라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19년 차 뮤지컬배우로 산다는 것
배우 홍륜희의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뮤지컬을 시작하게 된 순간이죠.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성악을 전공해서 대학도 성악과로 갔어요.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오페라 액팅 코치로 오셨던 선생님이 뮤지컬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제 목소리가 성악 전공자치고는 날카롭게 꽂히는 소리였는데, 선생님 생각에 뮤지컬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많을 것 같았나 봐요. 그때 뮤지컬을 처음 알게 됐어요. 곧바로 진로를 바꾼 건 아니지만 졸업할 때쯤에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니 성악가보다는 뮤지컬배우가 되는 게 무대에서 노래할 확률이 더 높겠더라고요. 그래서 어찌어찌 경험 삼아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합격했어요. 그 작품이 유인촌 선생님이 대표로 계시던 유시어터에서 만든 음악극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에요. 그 오디션에 합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어떻게 뮤지컬배우 활동으로 이어지게 됐어요?
유인촌 선생님께서 제게 가능성을 보셨는지 극단에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제가 어르신들 말씀은 잘 듣는 편이라 바로 연수 단원으로 입단했죠. (웃음) 입단하고 3년 정도 지났을 때 선생님께서 일본 극단 시키에서 경험을 쌓고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시키에 입단하고 나서 유시어터가 해체됐고, 저도 제 나름의 길을 개척해 보고 싶어서 6개월 만에 시키를 나왔어요. 마침 극단 시키에서 인연을 맺었던 음악감독님이 <댄서의 순정> 앙상블로 불러 주셔서 본격적으로 뮤지컬배우 활동을 시작했어요.
애초에 연극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3년이나 극단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순전히 사람이 좋아서였어요. 극단에서 처음으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경험하게 됐거든요. 무대 위든 아래든 서로 부대끼며 지내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연습실에서 같이 밥도 해 먹고 술도 마시고. 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어요. (웃음)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제가 배우로서 다듬어지는 시간이었고요. 여러모로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어요.
데뷔 10년 만에 <날아라 박씨>로 처음 주연을 맡았어요. 그 후에도 주연보다는 조연으로 활동을 많이 했고요. 주인공에 대한 욕심은 없었나요?
뮤지컬배우로서 저의 방향을 설정하기까지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신 분이 두 분 계세요. 한 분은 제가 존경하는 노래 선생님이고, 다른 한 분은 <왕세자 실종사건>의 서재형 연출님이에요. 노래 선생님은 제가 스물여덟 살 때 주연보다는 색깔 있는 조연을 하라고 조언해 주셨고, 서른두 살 때 만난 서재형 연출님은 앞으로 제 나이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에 도전하라고 하셨어요. 두 분 다 제게 애정을 갖고 해주신 말씀이란 걸 알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너무 속상해서 엉엉 울었어요. 그런데 마음을 추스르고 두 분의 말씀을 곱씹어 보니 왜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때부터 일부러 조연 위주로, 나보다 나이 많은 역할 오디션만 봤어요. 나이를 먹고 보니 주인공만 고집했으면 지금처럼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그때는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두 분의 진심 어린 조언 덕분에 뮤지컬배우로서 꾸준히 다채로운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맞아요. 륜희 씨는 또래 배우 중에는 꾸준히 다양한 배역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는 편이죠. 데뷔 후에 매년 쉬지 않고 공연하고 있고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특별히 작품 계획을 세우는 건 아닌데, 신기하게도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의 제안이 들어와요. 어쩌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곳에서 출연 제안을 받으면 먼저 제안받은 작품을 선택해요. 일종의 의리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20, 30대에는 주로 재공연에 많이 참여했어요. 신작보다는 재공연이 먼저 출연 제안을 주실 확률이 높거든요. 공연이 끝나기 전에 다음 시즌도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하고요. <블랙 메리 포핀스> <머더 발라드> <명동 로망스>는 네 시즌 이상 참여했어요. 40대로 넘어오면서 재연보다는 신작을 많이 하고 있어요. 2020년에 참여했던 <위대한 개츠비>라는 이머시브 공연을 잘 마무리하니까 <그레이트 코멧> <킹아더> 그리고 <미드나잇>까지 색다르고 재미있는 작품에 참여할 기회가 오더라고요.
<나무를 심는 사람들>로 데뷔한 지 벌써 19년이 됐어요. 19년 차 뮤지컬배우로 사는 건 어떤가요?
아주아주 힘들어요. (웃음) 뮤지컬을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어요. 한번은 엄마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아도 괜찮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뮤지컬은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경험이 늘어날수록 아는 것도 많아지니까 부족한 게 더 잘 보여요. 오랫동안 무대에 섰는데도 아직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못 내는 제 자신한테 짜증 날 때도 있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1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는 열정과 사랑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방증 같아서 스스로 대견하기도 해요. 뮤지컬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크지만, 저에겐 아주 좋은 스트레스예요.
지금까지 달려온 만큼 또 앞으로 나가야 할 텐데, 앞으로 뮤지컬배우로서 어떤 계획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을 열심히 살면 내일의 보상이 있을 거라 믿어요. 이 믿음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이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요. 조금 더 구체적인 목표를 이야기하면 지금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다른 매체에도 도전해 보고 싶고요. 계속해서 제 안에 다양한 모습을 꺼내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5호 2022년 8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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