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지>는 1892년 미국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 범죄 ‘리지 보든 사건’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아버지와 계모를 도끼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 보든 가의 둘째 딸 리지 보든이 주인공이다. 유연정은 리지의 곁을 지키는 친구 앨리스 러셀 역을 맡았다. 2022년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를 밟았던 그는 이번 시즌 더욱 성숙한 앨리스를, 그리고 앨리스만큼이나 성숙해진 ‘뮤지컬 배우 유연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년 만에 다시 <리지> 무대로 돌아왔어요. 그동안 <그레이트 코멧> <알로하, 나의 엄마들> <사랑의 불시착> 등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뮤지컬 배우로서 경험을 쌓았는데, 경험을 쌓은 후 다시 앨리스를 만나니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던가요.
새롭게 발견한 부분이 정말 많아요. 앨리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니까 제가 무대 위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이전 시즌에는 뮤지컬 첫 도전이다 보니 대본에 쓰여진 부분과 연출님이 설명해 주신 부분을 최대한 잘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번 시즌에는 제 안에서 저만의 서브 텍스트를 많이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앨리스는 리지와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인물이기 때문에 리지의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의 고통에 함께 아파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리지를 밝게 부르는 장면에서도 마냥 밝기보다는 의미심장한 감정을 담아 불러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다방면으로 여러 시도를 해보려고 했고, 이전 시즌에 비해 조금 더 깊이 있고 성숙한 앨리스를 보여드리기 위해 신경 썼어요.
앨리스는 ’리지와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라고 소개되는 인물이에요. 앨리스에게 리지는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나요?
앨리스와 리지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 사이이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친구 이상의 관계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억압 받던 시대에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는 것을 넘어 깊은 곳에서 나오는 끈끈한 유대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테니까요.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진한 무언가가 있는 사이죠. 한 마디로, 앨리스에게 리지는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자, ’네가 살 수 있다면, 널 위해 내가 죽을게‘라는 태도가 가능한 존재예요.
이번 시즌 리지 역은 김소향, 김려원 이봄소리 배우가 맡았어요. 세 배우와의 호흡은 어때요?
세 배우의 리지가 정말 많이 달라서, 앨리스로서 제가 느끼는 감정도 그때그때 다르게 표현되더라고요. 먼저 김소향 배우는 리지가 각성을 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과정에서 언니의 뮤지컬 배우로서의 모든 내공을 다 쏟아부어요. 언니가 연기하는 리지를 보면 매번 소름 돋아요. 김려원 배우는 이전 시즌에 엠마 보든 역을 맡아서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그래서 리지도 그런 결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달라요. 세 명의 리지 중 가장 약하고, 안쓰럽고, 바스러질 것 같죠. 이봄소리 배우의 리지는 다부져요. 봄소리 언니는 제가 ‘언니 안에 장군님이 산다’고 말할 정도로(웃음) 다부진 성격인데, 그 성격이 무대 위에서도 보이더라고요.
앨리스가 부르는 넘버는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지만, <리지>의 넘버는 대부분 록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강렬한 넘버잖아요. 넘버를 소화할 때 어려움은 없나요?
가끔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어요. 대부분 목을 많이 써야 하는 넘버이다 보니 목 관리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목을 아끼자니 넘버의 맛이 사라지거든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넘버의 맛’을 선택해요. 내가 조금 힘들지언정 관객분들께 좋은 공연을 보여드리는 게 당연한 거니까요. 사실 목이 정말 안 좋은 날에 ‘오늘은 목을 90% 정도만 쓰고 내려와야겠다’고 다짐해도,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120%를 쓰고 있더라고요. (웃음)
저는 <리지>의 모든 넘버를 정말 너무 사랑해요. 밴드 사운드가 심장을 울리거든요. 하드한 넘버를 소화할 때 느껴지는 짜릿함이 있어요. 커튼콜 때 관객분들과 다 함께 떼창을 할 때도 소름 돋아요. 저희끼리 ‘관객분들 진짜 미쳤다’고 얘기할 정도로요. (웃음) 어떻게 그렇게 넘버를 완벽하게 숙지하셔서 함께 불러주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관객분들이 무대에 올라와서 노래를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예요. 그렇게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 신기해요. 특히 저희 작품이 여성 간의 연대를 크게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관객분들도 그 연대감을 직접 느끼고, 함께 표현하는 것에 크게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리지>는 억압을 깨부수는 여성들의 이야기예요. 아이돌, 연예인은 아무래도 대중의 시선 아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리지>를 연기하며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질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많이 느껴요. 아이돌로서의 삶에 대한 해방감을 느낀다기보다는 인간 유연정으로서 살면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의미에 가까워요. 사실 제가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어요. 팬분들이 충격 받으실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오히려 팬분들이 저보다 더 통쾌하게 즐겨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어요. 그 안정감 덕분에 무대를 더욱 즐기게 됐고요.
같은 작품을 했던 동료 배우의 차기작도 자주 보러 다니더라고요. 그만큼 동료 배우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의미이겠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경험에 대한 즐거움도 크게 다가오겠어요.
중학생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했고, 고등학생 때 데뷔를 해서 친한 친구가 멤버들 말고는 없었어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죠. (웃음) 그런데 데뷔하고 6~7년 만에 처음으로 <리지>를 통해 새로운 친구가 생기게 된 거죠. 사회에서 친구를 사귀어 본 경험이 적다 보니 처음에는 ‘내가 상대방을 어디까지 믿고 내 얘기를 해야 하지?’라는 고민이 있었는데, 언니들이 저를 진심으로 대해줘서 저도 자연스럽게 언니들을 선배, 동료 이상으로 믿고 의지하게 됐어요. 정말 든든하고 행복해요.
이제는 뮤지컬 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텐데, 뮤지컬 배우로서 활동하며 어떤 점이 성장했다고 느껴요?
어른스러워졌어요. (웃음) 어린 시절부터 활동하긴 했지만, 나이에 비해 미성숙했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가수 활동 할 때는 저를 챙겨주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고, 혼자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뮤지컬 작업을 할 때는 창작진분들이나 프로덕션에서 저에게 직접 의견을 구하고, 저와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요. 많은 결정을 제가 직접 해야 하고요. ‘이런 게 어른이구나’ 싶어요. (웃음) 뮤지컬 덕분에 인간으로서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