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지>는 과격하다. 관객이 처음 듣는 문장은 “리지 보든 도끼로 엄마한테 마흔 번, 아빠한텐 아니야. 마흔하고 한 번 더”다. 상상하기 어려운 문장 뒤로는 심장을 울리는 드럼 비트와 휘몰아치는 기타 리프, 포효가 쏟아진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면, 보든 저택 안의 여성들이 겪은 끔찍한 폭력을 목격하게 된다. 미스터 보든은 구두쇠로 유명했고, 자신의 이름인 ‘앤드류’를 리지의 미들네임으로 지을 만큼 가부장적이었다. 그 결과 두 딸인 엠마와 리지는 거주와 소득 등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당했다. 무엇보다 친부의 성적 학대가 자매의 삶을 부숴버렸다. 여성들의 고통은 자매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브리짓은 보든 가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제 이름대로 불리지 못하고, 앨리스는 언제나 외톨이다. 이들은 여성이자 노동자, 여성이자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이중 차별에 노출되어 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폭탄처럼, 무대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겹겹이 쌓인 폭력은 상황을 은밀하게 묘사하는 움직임, 분노를 토해내는 록 넘버들, 울분과 비명으로 가감 없이 표현된다. 날 것의 포효와 욕설에는 지속적인 폭력에 무기력하던 리지가 처음으로 직면한 내면이 담겼다. 가해와 피해를 명확히 구분하고 자기 잘못이 아님을 자각함으로써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첫 번째 감각. 그 결과 자신을 죽이려던 선택은 가해자를 향한다. 보든 부부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가 다른 의미의 용기가 된 셈이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겨난다. 살인은 옳은가? 그러나 <리지>는 말한다. 윤리를 앞세우기 전에 피해자의 삶을 보라고.
폭력을 소재로 하는 만큼 무대 위의 수행자도 괴롭지만, 이들을 지켜보는 관객도 편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격’이라는 선택이 필요한 것은, 리지 보든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피해자의 목소리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의 자격을 묻고, 피해 사실을 가십으로 소비한다. 그러니 피해자는 더 강하게 피해 사실을 외치거나, 쏟아지는 2차 가해를 피해 숨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를 제외한 다수가 제대로 듣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듣게 할 것인가. <리지>의 답은 퇴장과 재입장이 어려운 공연예술의 특성을 이용해 모두가 목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리지>를 관람하는 것은 일방향으로 쏟아지는 폭력을 직면함으로써 네 여성이 겪은 각자의 감옥을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분노, 거절이 거절될 때의 공포와 무력감, 자유를 향한 갈망.
1막이 피해자의 목소리에 집중한다면, 재판과정을 다룬 2막은 피해자를 향한 세상의 모순을 다룬다. 사회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네 여성은 자신들을 향한 이중잣대를 비틀며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모든 고결한 남성이 숭배하고, 모든 관대한 남자가 사랑하며, 모든 현명한 남자들이 은혜를 입었음을 인정하는, 그 성별의 리지 양이 욕망과 분노와 힘 그리고 집요한 증오를 가지고 도끼로 살인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신들의 주장에 발목 잡힌 사회는 리지의 무죄를 선언한다. 삶의 모든 선택에서 제외되었던 이들이 스스로 써 내려가는 블랙코미디는 그 자체로 자유다.
<리지>의 카타르시스를 더욱 깊게 만드는 것은 피해자들의 연대다. 같은 폭력의 피해자이자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 엠마, 무시와 고립 안에서 살아야만 했던 브리짓과 앨리스. 이들의 연대는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누군가가 가장 약한 면을 공격받을 때 가장 먼저 나서서 곁에 서는 것으로 완성된다. 사건의 진실에 집중했던 앨리스가 리지와의 관계를 추궁당하며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리지와 엠마, 브리짓이 앨리스의 뒤를 단단히 지키고 있던 것처럼. 피해자들의 연대는 희망의 불씨가 된다.
무죄 판결을 받은 리지는 노래한다. “언젠가는 다 말할래. 온 세상이 이해할 수 있게.” 1892년의 리지 보든 사건이 뮤지컬로 완성되기까지 107년이 걸렸다. 2009년에 미국 초연된 <리지>가 한국에 오기까지는 11년이, 새로운 시즌으로 관객을 맞이하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다행스럽게도 여성들의 용기는 점점 더 가까워진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도, 그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연대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폭력을 간접 경험한 관객들도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결국, 희망은 사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