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특집_<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
매일 밤, 무대 위에는 크고 작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무대 위와 아래, 당신의 삶을 가득 채운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네 번째 인터뷰이는 배우 박강현입니다.
박강현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그에게는 낯간지러운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창한 미사여구로 자신의 성과를 포장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선택했고, 해야 하는 일이기에 무대에 선다고 말하는 배우. 그러나 무대 위에 있는 순간만큼은 관객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배우. 화려한 의상을 입고 극 중 인물의 희비를 속속들이 그려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새하얀 니트 한 장으로 표현 가능한 배우. 최근 뮤지컬 <알라딘> 무대에 서고 있는 박강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화이트 톤의 의상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건, 어떤 캐릭터의 옷이든 입을 수 있는 백색의 배우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과거 인터뷰를 보니 스스로를 '도화지 같은 배우'라고 표현한 적 있던데, 그 생각은 현재에도 변함 없나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대신 과거에는 제 위에 색을 연하게 칠하는 법만 알았다면, 이제는 색을 조금 더 진하게 칠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그간 쌓아온 경험들이 제가 조금 더 진한 색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거죠.
최근에는 뮤지컬 <알라딘>에 출연 중이에요. 매 작품 '이번이 진짜 힘들다'고 말한 걸 봤는데, 이번에는 어떤가요?
지금까지 했던 작품 중에 제일 힘들어요. 진짜로요. (웃음) 공연도 공연이지만 연습 과정이 정말 힘들었어요. 매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 6일 연습을 했거든요. 제 삶에서 이렇게 규칙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데! 초연작이다 보니 한국어 번역을 거치면서 대사가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수정되었는데, 그래서 대사를 매일 새롭게 외운다는 마음으로 연습했던 기억이 나요. 원래 춤에 대한 부담이 큰 편인데 <알라딘>은 안무가 많아서 안무 연습하느라 녹초가 되기도 했고요.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면 저도 모르게 아무 것도 못하고 졸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잠시나마 직장인의 삶을 살아보면서, '아 나는 정말 직장인은 못하겠다' 생각했어요. (웃음)
<알라딘>은 서울 공연 기간만 6개월이 넘잖아요. 중간에 지치지 않으려면 마인드 컨트롤이 필수겠네요.
<하데스타운>도 지방 공연까지 포함하면 꽤 긴 기간 공연했는데, 그때 마인드 컨트롤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매너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요. 매일 무대 위에서 제대로 살아 숨 쉴 수 있게 해달라고 스스로 되뇌었죠. 그 덕분인지 매너리즘 느낀 적 없이 잘 끝났어요. 사실 <알라딘>은 워낙 밝고 행복한 분위기의 공연이다 보니 지칠 거라는 걱정은 없어요. 공연이 몸에 익숙해질수록 더 행복하게 매 공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젠가 한 번은 공연 중에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객석에서 들려오는데, 그게 되게 기분이 좋고 힘이 나더라고요. 앞으로 계속 그런 에너지 속에서 공연할 수 있지 않을까요.
Q. 배우로서 초석을 다지던 시기, 과거 당신의 세계를 구성했던 존재는 무엇인가요?
제 선택, 제 의지요. 저는 제가 선택을 했기 때문에 무조건 이 길로 계속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원래 제 꿈은 과학자였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런데 그 오랜 꿈을 포기하고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저 스스로도 이 일은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과거의 제가 현재의 저에게 계속 말하고 있는 거예요. 넌 이 길을 가야 한다고.
과거의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현재의 내가 노력하고 있는 거네요. 자기 합리화를 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요? '내 선택인데, 내가 번복해도 되지 뭐.' 같은.
과거의 내가 했던 선택을 현재의 내가 부정해 버리면, 과거의 나에 대한 소중함이 사라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 저는 그렇게 걱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고민이 생기는 사람은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걱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걱정은 없었어요.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외모를 가진 것도, 키가 큰 것도,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니까 할 수 있는 나만의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늘 해왔던 것 같아요. 제가 잘났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냥 '남들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 생각한 거죠.
그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부족한 내 모습만 보며 움츠러들기 마련이잖아요.
어렸을 때 되게 소심하고 내성적이었어요. 사람들 앞에 서면 식은 땀이 날 정도로 불특정 다수의 앞에 서는 걸 어려워했어요. 그런데 그런 저 자신이 싫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이겨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떨지 않고, 당당한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렇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변화한 것 같아요. '나도 저렇게 행동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다 보니, 정말 그렇게 된 거죠.
Q. 당신의 현재를 구성하는 것 중,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요.
멋 부리지 않는 태도.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무대 위에서 억지로 멋을 부리고 싶지 않아요. 그저 인물을 열심히 연기하면서 관객들에게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죠. 사실 예전부터 알았어요. 저는 무대 위에서 멋 부리는 걸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배우로서 본질을 추구하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쉬운 길로 가려고 하지 않고 본질을 추구하는 마음은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요.
2015년 <라이어 타임>으로 데뷔하고, 2018년 <웃는 남자> 무대에 올랐어요. 데뷔 3년 만에 대극장 뮤지컬 주인공 자리를 꿰찼으니 굉장히 빠른 성공을 거둔 거잖아요. 당연히 실력이 뒷받침 되어 주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성공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강현 씨는 항상 '운이 좋았다'고 말하더라고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웃음) 괜히 겸손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저는 진심으로 운이 좋았어요. 좋은 타이밍에 좋은 작품들이 제게 와줬어요. 매 작품 배울 것이 많은 캐릭터를 만났고요. 그런데 사실 실력이 아니라 운이 따라줘서 뭔가를 이루게 되면,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불안함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실력을 쌓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요. 그래서 매 순간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제 어쩌다 한 번 정도는 저 스스로 만족스러운 공연을 하는 날이 오더라고요. 그런 날이 자주 올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죠.
Q. 앞으로 만들어 나갈 강현 씨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여태까지는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제야 '뭘 좀 알 것 같은' 기분이거든요. (웃음) 이제는 본격적으로 저 자신을 발전시키는 재미를 느끼면서 배우로서의 세계를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인간으로서는 좀 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정하거나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손 내미는 걸 잘 못하는데, 이제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년에 데뷔 10주년이에요. 처음 배우를 꿈꾸던 시절 상상했던 배우로서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나,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요.
사실… 배우로서 10주년을 맞은 제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하기보다는,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편에 가깝거든요. '어디로든, 어떻게든 흘러가겠지'라는 마음으로요. (웃음) 그런데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새삼스럽게 신기해요. 이렇게 좋은 기회 속에서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다니.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데, 이제는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고, 자기 객관화도 잘 할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정말 많이 부족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저를 꾸준하게 사랑해 주시는 관객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10년 전과 지금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저 자신이에요. 10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저 자신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Q. 창작자가 한 편의 공연을 만들면, 무대 위에서 그 공연을 완성하는 게 배우의 몫이잖아요. 매일 밤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완성한다는 건 강현 씨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잖아요. 매일 새로운 우주가 생겨났다가 없어지죠. 관객, 스태프, 배우 모두 하나가 돼서 그날 하루만 존재하는 우리만의 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무대에 서는 하루하루가 소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