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특집_<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
매일 밤, 무대 위에는 크고 작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무대 위와 아래, 당신의 삶을 가득 채운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다섯 번째 인터뷰이는 김가람 작가입니다.
김가람 작가는 최근 뮤지컬 계에서 바쁘기로 손꼽히는 창작자 중 한 명이다. 현재 공연 중인 <테일러>부터 최근 막을 내린 <이터니티> <룰렛>까지, 그가 2024년 한 해에 참여한 크고 작은 작품의 수를 세다 보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쉼 없이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그는 호기심이라 답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이 자신의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작품에 녹여내어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작가 김가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뮤지컬 <테일러>부터 <이터니티> <룰렛>까지,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세 작품이 연이어 관객을 만났습니다. 작품을 연이어 선보인 소감이 어떠신가요.
제가 쓴 작품을 관객 앞에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생각지 못하게 정말 많은 분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라요. 매일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이 완전히 다른 작품들을 연달아 준비하다 보니, 제 안에 있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룰렛>은 ‘인간의 악’에 집중한 작품인 반면 <테일러>는 ‘인간의 선’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터니티>는 자서전을 쓰는 마음으로 집필한 작품이고요. 많은 분이 이렇게 각기 다른 이야기에 공감해 주신 덕분에 저도 제 내면의 여러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터니티>는 공연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많은 마니아 관객을 모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에요. 어떤 점에서 '자서전을 쓰는 마음'을 느꼈을까요?
<이터니티>는 글램록을 소재로 한 작품인데, 글램록에 관해 공부할수록 굉장히 외로운 장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는 반짝였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점에서요. 또, 꿈꾸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이자 잊혀진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죠. 그래서 대본을 쓰면서 제 입장에 많이 대입해 봤던 것 같아요. '내가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어요.
시간대가 얽혀있는 구조이고, 어떻게 보면 조금 낯선 분위기의 작품이기에 첫 공연을 올리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는데, 관객분들이 너무나 많이 사랑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사실 <이터니티>는 저뿐만 아니라 박정아 작곡가님, 프로듀서님 등등 모든 스태프가 깊은 애정을 가지고 '덕질'하듯이 만든 작품이거든요. 역시 창작자가 작품에 진심을 녹여내야 그 마음이 관객분들에게도 가닿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요.
Q. 창작자로서 초석을 다지던 시기, 과거 당신의 세계를 구성했던 존재는 무엇인가요?
15살 즈음, 어린 나이부터 무대를 꿈꿨어요. 처음에는 배우를 꿈꿨고, 대학에서는 연출을 공부했죠.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극작도 시작했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바로 뮤지컬 <아랑가>(2015)로 데뷔했어요. 그때가 25살 즈음이었으니 굉장히 어린 나이였죠. 심지어 정말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그 작품을 좋아해 주셨고요. 처음에는 마냥 기뻤는데, 얼마 안 있어서 부담감이 찾아오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작품이 사랑을 받다 보니 혼란스러운 마음도 있었고요. 혼란과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 봤는데, 우선 경험을 많이 쌓고, 제 한계를 넓히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작품에 작가, 연출로 참여했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10년 정도가 흘렀어요.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제는 ‘나만의 색깔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참여했던 작품들을 쭉 돌아보며 ‘나는 무슨 얘기를 해 왔나’ 생각해 봤어요. 그랬더니 두 개의 키워드가 보이더라고요. 숭고함, 그리고 소우주였어요. 제가 우주에 관심이 정말 많거든요. 힘들 때면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몸이 하나의 우주이니, 이 우주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어요. 매 순간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기에 세상을 바꾸는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 작품 속 인물들은 그럴 수 있길 바랐어요. 그러다 보니 제 작품 속에는 유독 투쟁하는 인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인간으로서 존재에 대한 고뇌가 있고, 고뇌로 인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결국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물들. 일상에 관한 이야기든, 대의에 관한 이야기든 무언가를 바꿔 나가려고 노력하는 숭고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많은 관심이 있어요.
Q. 당신의 현재를 구성하는 것 중,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요.
멈춰 있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요. 내가 어떤 부조리를 마주했을 때 멈춰 있지 않고, 투쟁하고, 희망을 지닌 채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결국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거라고 믿어요. 그런 생각이 <테일러>에도 담겨 있어요. <테일러>의 애덤은 ‘선’의 인물이에요. ‘착하기만 한’ 인물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이 세상에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 존재해 왔고,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믿어요.
또,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은 건 ‘유머’예요. ‘사랑을 검으로, 유머를 방패로’라는 문구를 좋아해요. 사랑이 있으면 무엇과도 싸울 수 있고, 유머가 있으면 무엇이든 맞설 수도, 포용할 수도 있죠. 그래서 진지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 속에서도 인간의 유머러스함을 조금이나마 담아내고 싶어요. 요즘 집회 현장에 개성 넘치는 깃발들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을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있습니다.
<테일러>의 메인 카피가 ‘이 폐허 위에 한낱 옷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잖아요. 이 시대에 뮤지컬은, 예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히려 폐허 위에서 예술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예술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심을 수 있는 하나의 씨앗’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당장은 그 영향력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씨앗을 심는다면 언젠가는 꽃으로 피어나서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웃음을 안길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여담이지만, 어린이 공연에 꾸준히 참여하는 이유도 그 생각과 맞닿아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한 번의 공연 관람이 꿈을 품는 계기가 되고,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아직 예술이 가진 힘을 믿습니다.
Q. 앞으로 작가님이 만들어 나갈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평행 우주’예요. 뮤지컬 <이프덴>에서 이야기하듯이, 내가 이 순간에 A를 선택하는지, B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나의 세상이 달라진다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이터니티>에서도 조금 녹여내긴 했지만, 언젠가는 평행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요.
전 사실 MBTI ‘J’인, 엄청난 계획형의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큰 목표는 세우지 않고 있어요. 언제부터인가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허탈감이나 분노가 너무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저는 늘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얽매여 있던 사람인데, 이제는 현재를 잘 살아내자는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어요. 물론, 요즘도 매일 매일 계획은 세우고 있지만요. (웃음)
이야기를 듣다 보니 관심사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우주, 과학, 종교, 철학처럼 큰 개념을 좋아해요. 거창하죠? (웃음) 어렸을 때부터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걸 좋아했어요. 조금 허황되지만, 빅뱅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는지 알게 되는 게 제 꿈 중 하나예요. 앞에서 말한 큰 개념들에 대한 궁금증이 결국은 나라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빅뱅 이전의 모습을 알게 되면, 제 머릿속에도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요.
Q. 당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각자의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 내는 것. 연극 <빵야>를 보고, 내가 만들어 낸 세계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 문득 생각했어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속해서 애정이 가는 아이들도 있고, 스쳐 지나간 아이들도 있죠. 전부 다 제 자식 같은 아이들인데 제가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서 모든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쭉 정리했던 적이 있어요. 그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앞으로도 내가 만든 세계 속의 아이들을 허투루 다루지 않고, 그 아이들 각자의 우주를 잘 지켜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