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이지나 연출가의 강점 중 하나는 배우들의 숨은 잠재력을 이끌어내 그들의 장점을 부각시켜준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배우들이 그녀의 무대를 통해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였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배우들이 그녀와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변신을 기대하고 있다.
어떤 캐릭터를 맡겨 놓아도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는 배우 김태한 역시 이지나 연출이 발굴해낸 원석 중 하나다.
2003년 <그리스>로 처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이후 열 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특별한 호흡을 맞춰왔다.
십년지기의 편안함보다는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짜릿함이 더했던
이지나 연출과 배우 김태한의 대화 일부를 지면으로 옮긴다.
서로 다른 사람들
김태한 아니 어쩌자고 이렇게 어려운 자리에 저를 부르셨어요. 선생님하고 단 둘이 무슨 얘기를 하라고…. 평소에 따로 챙기는 건 스승의 날 때뿐이라고요. 그것도 혼자는 쑥스러워서 동료 후배들 다 불러다 같이 밥 먹는 정도뿐인데.
기자 전에 이지나 연출님이 트위터에 쓰신 글을 보고 두 분을 함께 만나면 좋겠다 싶었어요. ‘내 작품 최다 출연자는 김태한 배우. 평가절하 당하는 넘버원 배우…’라는 내용이었거든요.
김태한 그런 글은 또 언제 쓰셨어요? 제가 트위터를 안 해서 몰라요. 인터넷도 잘 안 하고.
이지나 게임만 하니까 그렇지. 내 공연 최다 출연 배우는 너 맞잖아.
기자 2003년 <그리스>부터 <록키 호러 쇼>, <컴퍼니>, <대장금>, <탈>, <광화문 연가>, <아가씨와 건달들>, 연극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까지 무려 여덟 편이나 되던걸요.
이지나 재공연까지 치면 열 편도 훨씬 넘죠. <그리스>에서만 해도 로저, 케니키, 대니 세 개 역할로 무대에 섰으니까. 근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같은 배우와 여러 번 작업을 하면 그 배우의 인간성과 성격까지 좋아할 거라 생각한다는 거예요. 얘랑 나랑은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아요. 아마 태한이가 나를 제일 무서워하는 배우 중 한 명일 걸요? 재미도 없고 그냥 싫어요. 너도 마찬가지 아냐?
김태한 사실 그렇긴 한데(웃음) 저는 그냥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면 공감을 해요. 제 욕을 하시든, 세상 욕을 하시든, 칭찬을 하시든,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든요. 근데 같이 떠들면 너무 시끄러워지니까 그냥 듣고만 있는 거예요. 그게 편해요.
이지나 네가 말이 없어서 싫은 게 아니라 술을 이상하게 마셔서 그런 거야. 또 나는 잘생긴 사람을 좋아해. 배우는 작품에만 맞으면 되는 거예요. 무게 중심을 잡아줄 배우가 필요하면 그와 작업을 하면 되고, 노래 잘하는 배우가 필요하면 또 그들과 작업을 하면 되는 거죠. (고)영빈이나 리사, (정)선아처럼 말이에요. 근데 태한이의 경우는 어느 작품에서나 기둥이 되는 배우예요. 어떤 건물을 지어도 항상 들어가는 재료죠.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자 배우로서는 최고의 칭찬이 아닐 수 없는데요. <그리스> 오디션 때 태한 씨는 어땠나요? 그때가 처음으로 합격한 오디션이었다면서요?
김태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오디션으로 배역을 따낸 건.
이지나 오디션을 쫓아다니지도 않잖아, 너는.
김태한 왜요, <헤드윅> 오디션도 봤잖아요. 떨어져서 그렇지. 솔직히 다른 배우들처럼 치열하게 오디션을 못 치르겠더라고요. 내 가능성을 보이는 자리인데 마치 완성된 그림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때문이랄까. 물론 내 걸 다 보여주고 기회를 달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성격이 그러지를 못해서….
이지나 배우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 가능성을 발견하고 연습 기간에 어떤 그림을 만들 수 있겠다 싶은 배우를 찾아내야 하는데, 이미 완성된 그림을 가져온 배우들을 찾으려고 해. 아무리 오디션을 잘 봐도 그게 끝인 배우들이 있는데, 나중에 보면 꼭 그런 배우들이 합격을 해요. 오디션 가서 만날 떨어지는 애들도 있죠. 태한이나 리사처럼. 리사는 아직 연기가 부족하고 오디션 공포증도 있지만, 태한이의 재능을 알아보는 스태프들이 별로 없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믿고 맡기면 엄청난 재능을 가진 배우인데 말이죠. 덕분에 내 작품에 계속 데려다 쓸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웃음) <그리스> 오디션 때 태한이는 모든 면에서 1등이었어요. (양)준모나 (홍)광호처럼 절창은 아니지만 팝 스타일의 음악을 사용하는 뮤지컬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봤죠. 연기나 춤은 말할 것도 없고.
김태한 제가 볼 때 선생님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배우의 재능을 정말로 잘 활용하신다는 거예요. 배우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작품에 끌어다 쓰세요.
이지나 실패한 경우도 있어.
김태한 그중 하나가 저죠. 제일 많이 같이했지만 가장 못 뜬 배우이기도 하고.
이지나 여자들이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라 그래. 관객층의 나이를 생각해봐. 어릴수록 절대미에 반응하는 게 당연한 거야. 이왕이면 아름답고 잘생긴 남자가 춤추고 노래하기를 원하지 너한테 시각적인 고문을 당하고 싶겠니.(웃음) <록키 호러 쇼> 같은 독특한 작품에서 충분히 주연을 할 수 있는 결을 가진 배우이지만,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원하는 보통의 주인공감은 아니라는 거야.
김태한 제가 연출이라도 저 같은 외모의 배우를 주인공으로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라면 특히.
이지나 멜로를 해도 넌 누구보다 잘할 거야. 하지만 누가 보러오겠어. 현실이 그래. 우리나라에는 너처럼 다 잘하고 못난 배우는 많아도 스탠더드 미남인데 노래 잘하고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가 드물어.
기자 연출님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에 상처받는 배우들도 꽤 있을 것 같아요.
김태한 많죠. 저도 처음에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웃음)
이지나 상처 좀 받으면 어때요. 나는 내가 아끼는 배우들, 나랑 작업하는 배우들이 어디 가서 자기 파악 못하고 욕먹는 걸 볼 수가 없어요. 프로 배우라면, 자신이 뭘 잘하고 못하는지, 외모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재능이 있고 어떤 점이 부족한지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그러지 못한 배우가 얼마나 많은데.
기자 그런 면에서 김태한 씨는 너무 겸손한 편 아닌가요.
이지나 원래 성격도 자기한테 잔인한 면이 많은 앤데 한술 더 뜨는 연출을 만나 십 년을 지내다보니 더 삐뚤어진 거죠.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하는 배우들이 제일 안타까워요. 자기랑 안 맞고 못할 작품이라면 안 해야지 왜 무리를 해. 나도 내가 연출해서 망칠 것 같은 작품들은 거절해요.
서로에 대한 정확한 이해
기자 태한 씨는 어떤 작품에도 쓰일 수 있는 배우라고 하셨는데, 그 중 어떤 작품과 특히 잘 맞았다고 생각하세요?
이지나 고궁뮤지컬 <대장금>의 오겸호. 제일 잘한 것 같아요.
김태한 의왼데요. 잘한 건 모르겠고 잘 맞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그리스>의 케니키 같아요. 저의 삐뚤고 못된 성격을 십분 활용하셔서 제 몸에 맞춰주셨어요. 코엑스에서 공연한 <록키 호러 쇼>도 잘 맞았던 것 같고.
이지나 솔직히 <그리스>의 로저나 케니키, <아가씨와 건달들>의 나이슬리 같은 캐릭터는 태한이한테 너무 쉬운 연기에요. 따로 노트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가 김태한이라는 배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정확하게 적정선에서 진지하게 웃음을 전달하고 주인공보다 더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에요. 우리나라 조연들은 어떻게든 튀고 웃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김태한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던지고 가세요. 의사소통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숙제를 주시고 저는 거기에 맞게 캐릭터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이슬리의 경우는 노래가 약한 대신 몸을 많이 쓸 수 있도록 캐릭터를 바꿔주셨고요.
이지나 연출자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할 줄 아는 것도 배우의 능력이에요. 몇 작품을 같이해도 내가 싫어하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같이 작업하지 않게 되거든요. 그가 못해서가 아니라 결이 다르고 안 맞는 거죠. 태한이는 내가 어떤 걸 싫어하는지 정확히 아니까 계속 작업하게 되는 거예요.
기자 태한 씨는 몸을 잘 쓰는 배우로도 유명하잖아요.
이지나 타고났죠. 몸을 워낙 잘 쓰니까 슬랩스틱 코믹감도 정말 좋아요. 신체 훈련이 안 된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3미터 뒤에 서라는 주문을 정확히 해내는 배우가 드물 정도로 말이에요.
기자 춤을 따로 배운 적이 있어요?
김태한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관심은 많았어요. 춤을 잘 추고 싶어서 노력도 해봤고.
이지나 대학교 동아리에서 한 보잘것없는 노력을 말하는 거니 지금.(웃음) 자기 그릇은 또 정확히 알아요. <아가씨와 건달들> 할 때 이용우 옆에서는 안 되는 걸 아니까 아예 춤을 안 추더라고. 무열이한테는 적당히 각만 잡으라고 충고하고, 용우한테는 노래에 힘 빼지 말라고 하고.(웃음)
김태한 안 되는 건 빨리 인정하고 내려놓는 게 속 편하잖아요.
이지나 그래서 관객들이 너를 못 알아보는 건지도 몰라. 항상 평균보다 플러스에 있지만 일정한 수준에서 머물러 있으니까. 아예 못하면 눈에 띄기라도 하지.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이건 칭찬이야.
믿음만큼 큰 기대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한 씨한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이지나 치아 교정이요. 2003년도에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뭔 고집을 부리느라 안 하더니 이제야 하더라고요. 십 년 만에, 그것도 다 늙어서.
김태한 치료를 시작하고 제일 먼저 선생님께 연락 드렸다가 욕만 먹었잖아요. <그리스> 대니 할 때였나? 연습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더니 병원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수술하러. 제가 외모에 신경을 아예 안 쓴다면 거짓말이지만 과한 욕심은 없거든요. 얼굴로 승부를 걸 거면 집을 팔아도 안 되는 문제니까. 치아 교정은 나이든 배우로 조금은 중후한 분위기가 필요할 것 같아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발음이 부정확해지는 게 느껴져서 하게 됐어요.
이지나 나이 들면 발음이 샐 걸 알아서 권했던 거야. 물론 적당히 크고 잘생기고 연기 잘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주인공을 찾기가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말이야. 하늘이 두 쪽 나는 미남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치아 교정이라도 해서 귀여운 이미지를 벗어보자고 한 건데 그게 싫다고 고집을 부리더라고.
기자 계속 이어지는 이지나 연출님과의 작업 때문에 놓치는 작품들도 꽤 많았을 것 같아요.
이지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특히 <판타스틱스> 한다고 하면 안 말려요. ‘Try To Remember’는 얘 목소리와 정서랑 잘 맞거든요.
김태한 이런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하고 싶은 작품이 별로 없기도 해요. ‘어떤 작품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말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이지나 태한이가 나한테 가장 아쉬운 건 ‘저 배우를 위해 이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영감을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홍광호를 보면 <벙어리 삼룡이>를 해보고 싶고, 정선아를 데리고 <간첩 김수임>이나 <장희빈> 같은 뮤지컬을 만들면 참 재밌을 것 같아요. 윤도현을 보면 코미디 뮤지컬을 해보고 싶고. 근데 태한이는 그런 생각이 들지가 않더라고요. 요즘 뮤지컬이 점점 가창력 좋은 배우들을 필요로 하다보니까 더 걱정이 돼요. 나는 곧 은퇴할 건데 아무도 태한이를 안 쓰면 어쩌나 싶어서. 못하는 역은 없지만 그렇다고 얘만 할 수 있는 역도 없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번 <광화문 연가>에 연출 대행으로 임명해뒀어요. 내 코드를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내가 은퇴해도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연출로 키우려고요.
김태한 난 정말 그거 못 하겠어요 선생님. 이러다 정말 내가 죽을 것 같아요. 배우를 하다 죽으라면 죽었지 연출은 성격에 안 맞아요.
이지나 네 성격이랑 너무 잘 맞거든? 연출은 원래 상처주고 욕먹는 직업이야. 어차피 네 인생이 그렇잖아. 그냥 계속 욕먹으면 돼. 요즘 나는 작품 전체 구성에 신경을 많이 쓰느라 배우들 연기까지 디테일하게 잡아주지 못하지만, 너라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는 한국에서 배우로 버티기 힘들어. 연출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니까 나처럼.
김태한 전 배우로 대성하겠다는 욕심 없고요. 그냥 연기하는 게 좋아요. 이렇게 편한 직업을 두고 왜 연출을 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나 선생님하고 소극장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지나 나 2년 후에 은퇴할 거라니까. 그 안에 소극장 작품까지 할 여유가 없을 거야. 앞으로 세 편의 창작뮤지컬을 더 할 건데 마지막 작품은 네가 출연도 하고 연출 대행을 해야 해. 그러니까 그냥 내 말 들어.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3호 2012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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