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의 팽팽한 대결
<쓰릴 미>는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린 로스쿨 청년들의 엽기적인 유괴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완성됐다. 이 작품은 두 주인공 네이슨과 리처드의 얽히고설킨 심리전이 백미인 만큼 무엇보다 두 배우가 지닌 역량이 중요하다.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두 배우의 팽팽한 기싸움이 작품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진 <쓰릴 미>의 2차 팀 역시 작품의 특성에 맞게 캐스트별로 다채로운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
리처드 정상윤 vs 임병근 vs 이동하
2009년 이후 여러 차례 네이슨으로 무대에 올랐던 정상윤이 이번에는 리처드로 새롭게 변신했다. 정상윤의 리처드는 등장부터 이지적이고 냉철한 모습이다. 지난 무대들을 통해 네이슨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만큼,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그를 조종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네이슨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탓인지 그 점을 이용하는 능력 또한 치밀하다. 네이슨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턱을 만지는 등의 스킨십이 좀 더 친밀하고 부드러워 그의 마음을 금세 녹이다가도, 네이슨이 극한에 치달아 불안에 떨 땐 오히려 냉담한 미소를 보내며 불안감을 더 증폭시켜버린다. 마치 둘 간의 관계에선 이미 네이슨 사용법을 터득한 초인처럼 느껴진다. 한편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성향이 큰 까닭에 내면의 두려움을 폭발하는 ‘두려워’ 장면에 이르렀을 때 인물의 급격한 무너짐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임병근의 리처드는 온몸에서 자신감이 뚝뚝 떨어진다. 실패를 모르고 자랐고, 앞으로도 절대 부러질 것 같지 않은 강인함이 묻어난다. 그는 상대적으로 외적인 조건들을 캐릭터에 유리하게 활용한다. 특히 큰 키를 내세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강렬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존재감이 강렬하다. ‘정말 죽이지’나 ‘내 차는 안전해’ 등 범죄를 저지르는 현장에서는 오랫동안 한곳을 응시하며 광기 어린 표정과 눈빛을 강조하는데, 이땐 마치 리처드의 악마적인 근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듯하다. 특히 살인에 대한 열망이 드러나는 ‘계획’ 장면에서는 그의 광기가 극에 치닫는다. 동생의 살인을 상상할 때는 큰 동선을 그리며 가사를 묘사하는 제스처까지 풍부히 표현해 사이코패스적인 느낌도 준다. “내 동생을 죽이면 아버진 ‘빡’ 돌겠지”란 부분에서 머리 위로 치켜든 손을 확 비트는 식으로 자신의 희열을 명확하게 짚어주는 것이다. 이런 특유의 광기에 사로잡힌 그이기에 이후 네이슨이 모든 것을 제어했을 때 영혼을 잃은 듯 넋이 나간 상태를 오래 지속한다.
이동하가 연기하는 리처드는 인물의 신경질적이고 정신분열적인 성향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 등에서 마치 약물에 취한 듯 계속 시선을 옮겨가며 눈빛을 흐뜨러트리는 모습이 그러하다. 또한 계획한 일을 네이슨이 헝클었을 때 벽을 손바닥으로 내려친 뒤 몇 초간의 정적 동안 손을 아래로 쓸어내리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런 지점들은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인물의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또한 그는 범죄에 대한 계획을 하나하나 묘사할 때마다 대사 끝에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다. 이런 성향은 이후 아이를 유괴하는 장면인 ‘내 차는 안전해’에서도 엿보이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리처드의 심한 감정 기복이 읽힌다. 이처럼 내면에 불안함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네이슨의 반전을 듣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도 가장 심해 보인다.
네이슨 오종혁 vs 신성민 vs 박영수
3년 만에 다시 네이슨으로 분한 오종혁은 여성성과 남성성이 중첩된 소년의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성향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통해 캐릭터의 강약을 조절해 나간다. 이러한 성향의 선별은 하나의 곡 내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정말 죽이지’ 장면의 경우 처음엔 리처드가 자신의 손을 잡아준단 사실 하나에 설레는 순수한 여성성을 드러내다가도, 점차 리처드에게 다가가며 뜨거운 욕망을 표출하는 남성적인 면모를 끌어내기도 한다. 한편 그는 가석방 심의를 받는 장면에선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털어내는데 이것이 네이슨의 현재와 과거를 좀 더 명확하게 대비시켜준다.
신성민의 네이슨은 극의 초반부터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이 느껴진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순한 얼굴이 그가 전해주는 리처드의 첫인상이다. 그는 리처드의 작은 손길 하나에 한없이 행복해하고, 그에게 기댈 수 없을 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극의 말미까지 자신보단 리처드의 존재감이 더 드러날 수 있도록 천천히 상대를 따라간다. 그래서 ‘쓰릴 미’ 장면에서 욕망보다 간절함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극의 후반에 다다랐을 때 그는 리처드와 네이슨의 존재감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무너진 리처드 앞에서 유독 많은 눈물을 쏟아내며 끝까지 유약함을 유지하지만, 이내 자신의 숨겨진 의도를 전달하며 오묘한 미소를 지어 작품의 반전을 더욱 인상적으로 전해준다.
박영수의 네이슨은 외향적으론 부드러운 이미지이지만 그 안에 의외로 강한 욕망이 엿보인다. 평소엔 다소 힘없는 말과 행동을 보이지만, 리처드가 범죄를 저지르고 자신을 실망시킬 땐 그의 눈빛과 몸짓에 유독 큰 분노가 서린다. 이는 네이슨이 그저 속절없이 리처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쓰릴 미’ 장면에선 조목조목 따지는 듯한 큰 움직임으로 분노의 폭발을 이루기도 한다. 한편 가석방 심의를 받는 장면에서의 한숨 섞인 어조는 인물 자체에 너무 그늘을 드리우게 하는 경향도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0호 2013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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