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하나를 위해서 천하를 버릴 수 있다’는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결정을 실제로 할 수 있느냐고 묻자 곰곰이 생각을 하던 성두섭이 말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랑을 선택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적어도 나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닌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제안을 받았다고 흔들릴 것 같지는 같아요. 열이 여왕의 남자로 입궁하는 것보다 사담과 함께 있기를 원했던 것에는 그런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성두섭이 생각하는 열은 자존심도 세고 자신감 넘치고 남자다운 인물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여리고 유약한 인물이다. “저는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흔치 않은 배경에 지금까지 못 본 신선한 소재도 매력적이었지만, 열이라는 캐릭터가 좋았어요. 구체적인 건 지금도 만들어가는 과정이지만 도전해볼 만한 역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뭔가 될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일단 그 이전에 마음이 끌렸어요.”
성두섭은 열과 사담,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동성애라고 잘라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깊은 우정도 넓은 의미의 사랑이고. 두 사람의 관계는 동성애라고 했을 때 흔히 생각하게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열에게 사담은 내 옆에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예요. 그런데 육체적인 욕망이나 예를 들어 키스를 한다거나 그런 건 없거든요.” 그가 바라는 것은 사담을 생각하는 열의 마음이 작품 내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지막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열의 선택과 그 결과로 인한 모습이 관객들에게 이해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열은 천하를 호령하는 여왕조차 갖고 싶어 하는 남자다. 뭇 귀부인들로 하여금 현실을 잊게 하는 꿈같은 밤을 선사하는 ‘운루’에서 첫손에 꼽히는 사내로서 태도나 화술은 물론이고 노래도 춤도 탁월해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춤에는 일가견이 있는 그이지만 전통무용이 결합된 안무는 녹록한 것이 아니다. “사실 뮤지컬을 하면서 제가 원래 춤을 췄다는 이야기를 잘 안 했어요. 여긴 정말로 제대로 춤을 배운 날고 기는 분들도 너무 많은 곳이고요. 게다가 한국무용은 배운 대로 금방 느는 게 아니어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어요.” 그는 손사래를 치지만 여성들의 환상을 채워주는 풍월주라는 존재를 그려낼 그에 대한 기대치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성적으로 개방된 통일신라 말기가 배경인 작품에서 화류계의 꽃인 남자에게 맡겨지는 대사들이 그저 얌전하고 모범적일 리가 없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당황스러울 만큼 성애와 관련된 노골적인 표현들을 시구로 가사로 읊어야 하는 것이 성두섭의 역할이다. “제가 그런 대사를 좀 많이 해야 하는데, 재미있는 게 처음 연습할 때는 듣고 있는 진성여왕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어요. 어쨌든 공연에서는 최대한 민망하지 않게, 듣기 좋게 하려고요.” 듣고 있던 김재범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 듣기 좋더라고요. 그냥 에이스가 된 게 아니었어요.(웃음)” ‘뭔가 될 것 같았다’는 성두섭의 예감은 허튼 것이 아닐 듯하다.
“리딩 때의 초기 대본으로 처음 읽었을 때, 흥미로웠어요. 하지만 누군가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을 했지 제가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그때는 예정된 작품이 있어서 스케줄도 안 됐고, 사담이 관객들이 기억하는 제 기존의 이미지처럼 연약한 캐릭터로 보여서 그것도 걸렸고요. 하지만 나중에 다시 제안을 받고 연출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여리고 연약한 인물이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어요. 작품과 캐릭터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듣고, 그렇다면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죠.” 김재범이 바라보는 사담은 열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머리로 알기 전에 몸에 각인시켜버린 남자다. “‘나는 열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다’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상황이 닥치면 정말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나가서 감싸 안으려 하는 그런 남자죠.” 거의 모성애에 대한 설명 같은 그 말을 들으니 사담은 어째서 열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상대에게 뭔가를 바라서 내가 이렇게 해줄게, 이런 게 아니에요. 어느 순간부터 그 마음이 나의 생활이자 삶의 일부가 되고, 점차 더 비중이 커져간 거예요. 그냥 그 사람이 내 삶의 결과인 거죠. 이 사람이 없으면 난 살 수 없어, 이 사람이 내 태양이야, 없으면 안 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로 그런 거예요.”
머리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본능처럼 반응하게 되는 강렬하고 깊은 감정에 대해 관객들이 어느 정도로 공감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 경험하기 힘든 것을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진짜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관객의 습성을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으니까 제가 그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건 어렵지는 않아요. 그런데 관객들은 내가 아는 것처럼 세세하게 다 알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걸 전달하는 게 제 몫이죠. 대본에서도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두 사람의 과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조각들만 숨겨져 있어요. 저는 관객들이 대본을 읽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연기를 좋아해요. 그건 너무 설명적이지 않냐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제가 하는 연기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작품과 사담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그분들이 ‘내가 기대한 그대로의 사담은 아니지만 충분히 납득 가능하고 매력 있다’고 느껴주면 좋겠어요. 욕심이 있다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력 있다’고 느낄 만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거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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