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춤, 몸짓 속의 대화를 찾는다
<레 미제라블> 초연 안무가 케이트 플랫
영국의 정상급 안무가 케이트 플랫은 자신의 이름보다 참여한 작품의 제목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는 데도 유능해서 카메론 매킨토시로부터 ‘1인 드라마스쿨’이라고 불린 그녀가 밀양에서 연희단 거리패를 위한 <햄릿> 동작 워크숍을, 서울에서는 공연예술협회가 주최한 안무 워크숍을 진행했다. 서울에서 마지막 워크숍을 마친 케이트 플랫을 만났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무용과 오페라, 연극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계시는데요.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작업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뮤지컬에서 춤은 서술적일 수 있습니다. 움직임을 통해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죠. 가사가 있는 음악과 어우러지면서 굉장히 단순한 것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레 미제라블>의 1막 마지막 행진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단지 네 개의 스텝 밖에 없어요. 아주 간단하죠. 그런데 배우들은 사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관객들은 그들이 전진하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 장면에서는 슬로우 모션을 이용해서 관객들에게 배우들이 느끼고 있는 극 중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뮤지컬 작업에서 좋아하는 것들이죠.
<레 미제라블>의 안무를 할 때 연출가가 분명하게 요구한 것이 있습니까? <레 미제라블>은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죠. 연출가 트레버 넌과 존 케어드는 회전 무대를 이용해서 이 작품을 영화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요. 제가 한 일은 캐릭터 별로 특징적인 움직임을 만드는 것, 그리고 전체적인 그림을 다듬는 것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작품에는 ‘춤’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어요. 제 임무는 움직임을 통해서 강렬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죠. 스텝이나 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안무’를 해달라는 것이 연출가의 요구였습니다.
말씀하셨던 행진 장면의 안무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연상시키는데 실제로 영향을 받으셨나요? 사실 그림 속의 혁명과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혁명은 다른 사건이죠(웃음). 하지만 들라크루아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구스타프 도레의 일러스트도 작품 속에 사용되었고요. <레 미제라블>에서 연출가들은 쇼적인 춤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될 수 있는 그런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주기를 원했습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영국 공연에도 참여하셨지요. 브로드웨이 공연과 비교해서 안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웨스트엔드 공연과 그 전에 한 쉐필드 공연의 안무를 했습니다. 쉐필드에서는 연출가와 주인공, 그리고 스태프들 중 다수가 유대인이었죠. 그들과의 교류, 그리고 아주 많은 리서치를 통해서 인위적인 면 없이 유대인의 삶이 작품 안에 실제로 녹아 있는 매우 독특한 공연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보통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힘든데 웨스트엔드가 아니어서 가능했을 겁니다. 물론 제롬 로빈스의 안무와 전혀 딴판은 아니었을 거예요. 안무의 기반이 되는 유대인들의 문화, 그들의 춤이 같으니까요. 그 작품에 대해 비평가들은 ‘마치 실제의 삶이 움직임이 된 것 같은, 역사가 무대 위에서 삶으로 표현된 작품’이라고 평했어요. 제롬 로빈스의 오리지널 안무는 아주 아름답고 예술적으로도 뛰어납니다. 하지만 제가 만든 안무는 그와 달랐어요. 저는 유대인들의 문화를 좀더 사실적으로 표현했고, 그는 객석의 관객들에게 보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 많이 생각했지요.
웨스트엔드 공연에서는 초연 안무가 제롬 로빈스의 저작권 때문에 제재가 있지 않았나요? 공연이 웨스트엔드에 올려졌을 때, 내가 쉐필드에서 만들었던 것 중에서 ‘Dream’ 신의 안무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사실 쉐필드에서는 유대인의 안식일 기도와 같은 아주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작품 안에 포함시키면서 유연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사전에 아주 치밀하고 심도 깊은 리서치가 있어야 가능하죠. 하지만 웨스트엔드에서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공연도 평은 좋았어요. 그런데 리뷰에 쉐필드 공연에 대한 언급이 정말 많았죠(웃음).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지금 투어 중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제롬 로빈스의 오리지널 안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솔직히 지루합니다. 물론 그는 천재적이고 그가 한 작업들을 존경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사람과 문화가 변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만약 제롬 로빈스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안무를 손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장 엄격한 클래식 발레조차 프티파의 오리지널 안무를 바탕으로 수많은 개정 안무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뮤지컬 안무가 더 보수적이라는 건 이상한 일이죠. 물론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는 중요하고 훌륭하지만 그것이 그 안무가 재해석하거나 수정될 수 없게 고정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뮤지컬 안무도 마찬가지라고 믿어요.
다양한 장르의 많은 작품을 하셨는데요.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들을 고르신다면? 오페라 <글로리아나>와 영국국립극장에서 했던 <세 자매>, 그리고 BBC에서 방송된 50분짜리 댄스 영화 <댄싱 룸>을 좋아해요. 런던은 정말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섞여 있는 도시라서 더 이상 전통이 하나가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 가지 사람들이 섞인 그곳에서 춤을 가지고 새로운 전통 하나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한 작품이에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댄싱룸을 오가면서 식사도 하고, 결혼도 하고, 누군가는 죽기도 하고, 춤도 추는…
공연이라는 것은 관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 관객들의 반응과 요구는 언제나 제각각입니다. 내 작업이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시나요? 먼저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그 다음에는 내 아이디어가 얼마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형상화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관객들의 머리 속에서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전혀 통제할 수 없으니까요. 영혼에 대한 연극을 만든 적이 있는데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종교에 대한 극으로 이해했죠. 결국 공연은 관객들이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창작자가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마다 전달하고 싶은 컨셉이나 이야기가 확실하게 있잖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연출가와 안무가와 작가와 디자이너가 모여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장 확실하고 간단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 찾아내는 일입니다.
한국에서 본 공연이 있으세요? 소극장 창작뮤지컬을 보았는데요. 연출이나 연기 면에서 전달하려는 바가 아주 명확하게 이해되는 작품이었지만 음악이 라이브로 연주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작품이라고 해도 뮤지컬의 음악을 녹음 반주로 트는 일은 없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려요. 2010년에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작은 극장에 올려질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가수 두 명, 댄서 두 명, 연주자 일곱 명이 참여하는 뮤지컬이에요. 연주자들은 악기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라이브 연주는 정말 중요해요. 제작비가 문제라면 출연 배우의 수를 줄여서라도 음악은 라이브로 연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