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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cene Scope] <엘리자벳> 무대 미술 [NO.102]

사진제공 |서숙진(무대디자이너) 정리 | 배경희 2012-03-13 5,714

화려함의 정수

 

공연 개막 전 국내 프로덕션은 <엘리자벳>에 대해 “화려함의 극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관객들이 <엘리자벳>에서 눈에 띄는 요소로 웅장한 무대를 보는 즐거움을 꼽는 걸 보면 그 의도는 성공적인 듯 싶다. 서숙진 무대디자이너의 표현대로 끝까지 쉽지 않았던 아주 긴 여행, 그 여정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유분방한 말괄량이가 황제와 결혼해서 황실에 들어가고,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미(美)에 집착하다가, 다시 끝없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뿐인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들을 끝까지 외면하더니, 아들이 자살하자 누구보다 괴로워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엘리자베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고백하자면 <엘리자벳> 무대 디자인의 첫 번째 과제는 엘리자베트라는 여자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내가 <엘리자벳>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이 작품을 사랑해 달라고 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오리지널 프로덕션에서 한국 공연을 위해 보내온 수정 대본을 읽으면서, 이 이상한 여자에 대한 의문점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작가 미하엘 쿤체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포인트를 따라가다 보니 엘리자베트의 행동을 납득하게 됐던 것.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결혼식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 추기경이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살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엘리자베트는 엄마를 한번 쳐다 본 후 “네”라고 대답한다. 엘리자베트가 황제 요제프의 사랑에 확신을 가지고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황제가 청혼을 하니 얼결에 왕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본을 읽을수록 생각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추앙받았던 황후가 무엇이 그토록 괴로웠을까?”에서 “엘리자베트에게 왕궁은 예쁘고 화려한 새장에 불과하지 않았을까?”로 변해갔다(무대 천장에 새장 무늬를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다).

 

 

 


사실 디자인 구상 단계에서 내가 그렸던 건 여백이 있는 상징적인 무대다. 내게 <엘리자벳>은 감정의 흐름을 보여줘야 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출가 로버트 요한슨은 무대 세트가 극을 서포트하기보다 그 자체로 메인 역할을 해주길 원했고, 스태프들과 의견을 나누다 왕가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비주얼적인 세트로 무대미술의 방향을 잡았다. 한 마디로 말해 ‘블링 블링’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단, <엘리자벳>이 몰락해 가는 왕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밝고 사랑스러운 화려함이 아닌 화려하면서도 어두운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또한 비주얼적인 세트와 더불어 드라마에 충실한 설명적인 무대가 이번 무대미술의 키워드다. 유럽 왕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국내 관객을 고려해 영상으로 배경을 설명하는 동시에 어딘가에 늘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표현되길 바랐던 것이다. 


무언가를 보여주려면 아무래도 많은 세트가 등장할 수밖에 없고, 세트가 많은 공연의 관건은 유기적인 장면 전환이 아닐까? <엘리자벳>의 경우 무대 상하부에 빈틈이 없을 만큼 세트가 많아서(크고 작은 세트의 제작 도면을 다 합치면 60개가 넘을 정도!),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암전 없이 장면 전환이 이뤄지게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고민 끝에 빠른 장면 전환을 위해 생각해 낸 장치가 도너츠 링 모양의 회전무대다. 대형 막 양쪽에 새겨진 엘리자베트의 실루엣이 게이트가 되어 회전무대 위에서 세트가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나가도록 설정한 것. 이번 세트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것이 바로 이 하부 장치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단순한 턴테이블이 아닌 리프트 장치와 세 개의 경사 무대가 들어가 있는 회전무대이기 때문이다. 리프트 장치와 경사 무대를 넣은 이유는 나는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엘리자베트의 심경 변화를 강조해서 보여주기에 좋은 장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왕가의 몰락을 보여주기에도 좋은 장치이다. 8미터의 턴테이블 안에 리프트와 경사 무대를 넣어야 했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지만,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닐까 하는 자부심이 있다.

 

 

 


이 작품의 매력적인 캐릭터, 토드를 어떻게 등장시킬 것인가 역시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다.  엘리자베트의 또 다른 자아, 혹은 동경의 대상, 왕조에 깃든 불운 등 초반에는 팀 내에서도 토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했지만 모든 스태프의 공통된 의견은 “토드는 무대 바닥에서 등장하면 안 된다”였다.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 공간을 흘러 다니는 공기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기본 구도인 브릿지와, 기둥을 사용해 항상 허공에서 등장하도록 했다. 토드가 등장할 때마다 그린으로 조명색에 변화를 줘서 무언가 분열되고 이질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가장 어려웠던 한 장면을 뽑자면 요제프의 악몽 신이다. 왕가의 몰락을 보여주기 위해 전체가 불타는 듯한 혼란스러운 느낌을 줄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경사 무대에 전식 작업으로 라이트를 심고 턴테이블이 회전을 하면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와 객석을 덮어서 전체가 악몽에 빠진 한 공간이 되도록 했다. 


<엘리자벳>은 아침 10시에 제작소에 들어가서 오후 5시에 나오기를 이틀에 한 번씩 했을 정도로 수고를 많이 들인 작품이지만 공을 들인 만큼 디테일이 잘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내에 엘리자베트라는 인물이 다소 낯설지라도, 극의 감정 라인이 잘 표현되면 엘리자베트의 아픔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고통의 정서가 잘 표현됐는지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지만, 우리 팀은 다들 한 마음으로 한곳을 향해 달려갔다고 믿는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2호 2012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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