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무대 위에서 그 캐릭터 자체로 존재하는 배우들이 있다. 어떤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독보적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연기 팁을 공개한다.
이주원 <형제는 용감했다> 오로라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말레나>. 장유정 연출이 캐릭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추천해 준 영화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올린 이미지가 우아하면서 관능적이고, 지적이면서 백치미가 있는 여자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 신경을 썼지만, ‘오로라’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건 역시 엉덩이를 뒤로 빼고 걷는 걸음걸이 아닐까. 그 걸음걸이는 상징적인 제스처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오로라만의 걸음걸이를 만들어 봅시다” 하고 엄청난 고민 끝에 만들어진 거다. 그리고 또 얼마나 오랜 시간 연습했는지. 처음에는 그런 포즈로 한 발자국도 채 못 걸었으니까. 오로라는 걸음걸이뿐 아니라 작은 몸짓 하나하나 여성스럽고 우아하게 보일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걸 조금 과장된 동작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과장된 캐릭터일수록 진정성이 없으면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오로라의 매력이 한껏 드러나는 ‘나를 선택해’ 장면(석봉과 주봉이 오로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자기를 택하라고 노래를 부르는 신) 관련 에피소드 하나. “맥주 집에 걸려 있는 달력 속 포즈있잖아, 그 느낌.” 이게 연출의 디렉션이었다. 난생 처음 듣는 디렉션이었지만, 그 순간 어떤 느낌인지 감이 확 왔다. 그날 집에 돌아가서 이불 위에서 밤새 달력 포즈를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이훈진 <맨 오브 라만차> 산초
<맨 오브 라만차> 오리지널 공연에서 산초는 나이 많은 배우들이 맡는 역이었다. 돈키호테보다 나이가 더 많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산초는 젊은 배우들의 몫이다. 이유는?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산초’를 원했기 때문이다. 극 자체가 무거운 분위기다 보니 극을 가볍게 풀어 나갈 감초 캐릭터가 필요했던 거다. 귀여운 산초를 표현하기 위해, 우린 산초의 연령대를 20대 초반으로 설정했다(원작에선 산초의 나이가 60대 즈음일 거다). 그런데 그때의 내 나이 30대 중반. 귀여운 척 말고, 진짜 귀여워 보일 수 있는 행동과 표정 연구에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귀여움을 발산하기 위해(?) 평소의 내 모습에서 많은 부분을 이끌어내야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게 산초표 뒤뚱뒤뚱 걸음걸이와 히죽히죽 표정이다. 이때의 ‘히죽히죽’은 입을 꾹 다물고 웃는 게 포인트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낸 게 속담을 엉뚱하게 말하기! 이를 테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누워 떡 먹기란 말이 있던데”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산초는 돈키호테라는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 같은 느낌을 살려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참, 산초 판자(Sancho Panza)에서 ‘판자’의 의미가 뭔 줄 아나. ‘배가 나온’이다. 배가 나온 산초. 내가 산초 역에 제격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닐까. 하하.
전아민 <젊음의 행진> 상남
초연 당시 내가 상남 역에 캐스팅되면서 캐릭터가 많은 부분에서 애초 설정과 달라졌는데, 가장 크게 변한 건 상남이 중성적인 인물이 됐다는 거다. 내 외모가 아주 남성적인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성적인 얼굴도 아니지 않나. 내가 가진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반영되면서 상남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만들어졌다. 그런 느낌이 보이시한 매력의 퀸카하고도 잘 어울리기도 했고. 극 중 상남의 여성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딱 한 번, 롤러장 미팅 장면에서다. 상남을 마음에 들어 하지만 과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남자애에게 “너도 매력 있어” 하고 콩콩거리며 뛰어나가는 그 장면 말이다. 상남이가 아무리 보이시하다고 해도 남자를 만날 때는 숨겨진 여성성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퀸카 아우라를 위해 상남의 기본 표정으로 설정한 건 ‘썩소’(단, 첫 등장 신에서만큼은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샤방샤방한 표정으로 등장한다). 또 극 중 대사 자체가 별로 없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도 말을 많이 안 하려고 했다. 말을 많이 하면 뭐랄까 포스가 깨질 것 같았다고 할까. 대본에 상남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상이나 소품을 활용해 성격을 표현해야 했는데, 리허설 당일 즉흥적으로 만든 일명 ‘포크로 머리 빗어 넘기기’는 관객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는 장면이 됐다. 어쨌든 상남을 연기할 땐, 앞서 언급한 대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중간 지점의 매력을 연구할 것.
유회웅 <캣츠> 미스토펠리스
<캣츠>는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의 성향에 맞게 캐릭터를 조금씩 바꿔준다. 예를 들어 호주 팀의 미스토펠리스는 요염한 고양이었지만, 내게 지정된 형용사는 ‘빠르고 장난기 많은’이었다. <캣츠>는 연습 자체가 자신이 관찰한 고양이의 특징을 즉흥 연기로 선보이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연습 시작과 함께 본격 고양이 행동 연구 돌입에 들어갔다. 빤한 말일지 몰라도, 고양이를 연기하려면 고양이의 습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고양이는 소리에 민감하고, 움직임이 유연하고, 동작이 빠르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 이런 특성을 바탕으로 나만의 미스토펠리스를 표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표정 연기다. 미스토펠리스는 말을 못하는 캐릭터이지 않나. 대사가 아예 없기 때문에 표정으로 말해야 했다고 할까. 다 같이 합창할 때 혼자 멀뚱멀뚱 서있을 순 없으니까 행동이나 표정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내가 귀여워했던 고양이의 표정과 행동이 호기심 가득해 보이는 눈빛이나 고양이끼리 서로 눈 흘김, 하품하면서 몸을 부비적거리기였는데, 그걸 많이 차용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빠져들어 하면 그게 최고인 것 같다. 나 역시 고양이 흉내를 내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계속 생각하고 연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묻어났던 것 같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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