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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Special] 우리가 기억하는 그 무대 [No.106]

글 |김영주 2012-07-17 5,411

공연계 관계자들과 뮤지컬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최근 10여 년간 공연한 76편의 창작 및 라이선스 뮤지컬 중 무대 디자인이 가장 뛰어났다고 생각하는 작품 2편을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그 결과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들을 정리해보았다.

 

 

 

 

 

<스위니 토드> 무대디자이너 정승호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지를 받았다. 이 공연을 제작한 박용호 프로듀서는 명작의 위용에 걸맞은 무대를 새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하면서 ”공연장에 도착해서 무대를 처음 본 순간 이 작품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깨닫기는 쉽지 않다. 거대하고 단순한 구조물과 앤티크 오브제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소시민이었던 스위니의 비극적 삶과 작품의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대본과 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핵심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대로 차갑고 비인간적인 질감의 철제 구조물을 큰 틀로 두고 작은 오브제의 디테일을 통해서 작품의 예민하고 불안정한 분위기를 한층 더 강렬하게 형상화했다.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는 다른 계층의 인간들이 제각각 서로에게 악영향을 미치면서 끔찍한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거대한 세트는 무시무시한 기계장치나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감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연 당시 유진 리가 디자인한 360도 회전이 가능한 골조 무대가 암전 없이 이어지는 극에 속도감과 황량함을 더했다면, 2007년 한국 공연에서 공연 내내 원 세트로 제자리를 지키면서 숨 막히게 관객들을 압박해 오는 철제 무대는 잔혹한 한 시대를 압축시킨 하나의 이미지처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무대의 뛰어난 점은 보편적으로 말하는 아름다움의 속성들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둡고 기이한 매력과 강렬한 에너지로 관객들을 집중시킨다는 점이다. 마치 손드하임의 음악이 그렇듯이 말이다.

 

 

 

 

 

<영웅> 무대디자이너 박동우
창작뮤지컬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작품은 예상대로 <영웅>이다. 조국과 아시아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의로운 인물 안중근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지만, ‘쇼’로서의 기능을 해야 하는 뮤지컬로 만들어질 때는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영웅>은 갈등 구조와 드라마가 단순하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비주얼적인 면에 특히 공을 들였는데 그 결과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무대미술의 진일보를 이룰 수 있었다.


국경을 넘고 대륙을 가로지르며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는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와 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들의 대결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무대미술이 해낸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항일 투쟁을 위해 무장 훈련을 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자작나무 숲에 서서 피의 서약을 맺는 장면에서는 그들이 느꼈을 벅찬 감정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한 시가전은 움직이는 여섯 개의 벽과 철제 구조물에 영상 효과를 가미하여 야마카시 액션을 펼침으로써 쫓고 쫓기는 이들의 긴박감을 더했다.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만한 장면은 단연 열차 신이다.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오는 기차의 외관과 기차의 객실 안을 잇달아 보여주고, 역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에서 곧바로 기차가 멈추고 승객들이 내리는 순간이 연출되기까지 한 치의 오차나 어색함도 없다. 시가전 신과 마찬가지로 이 장면에서도 무대와 영상의 절묘한 조화가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뉴욕 공연 당시 ‘무대의 렘브란트’라는 평을 받기도 했을 만큼 미학적으로도 뛰어나지만,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기차의 도착>이 관객들에게 안겨주었던 새로운 경험으로 인한 쾌감을 21세기 한국의 관객들에게 선사한 장면이기도 하다.

 

 

 

 

 

<서편제> 무대디자이너 박동우
뮤지컬 마니아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품은 <서편제>이다. 서구에서 발달한 뮤지컬이라는 공연 양식과 판소리라는 전통예술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에 대해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판소리 뮤지컬이 아니라 ‘판소리’를 하는 사람에 대한 뮤지컬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한 이 작품에서 무대 디자인 또한 당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오늘 걸어가면서 보는 것들과 내일 몸을 누일 곳의 풍경이 다른 소리꾼의 끝없는 방랑은 공간이 바뀌는 실제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소리라는 목표를 찾아 걸어가는 예술가의 수행을 상징하는 이중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쓸쓸할 만큼 사실적인 남도의 풍경을 무심하게 펼쳐놓는다면, 뮤지컬 <서편제>에서는 좀 더 환상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비주얼로 예인으로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엇갈린 소리 길을 담아낸다. 미닫이문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무대 배경은 흰색의 한지로만 겹겹이 메워져 있는데, 배우들이 둥근 회전무대를 따라 걸어가며 노래할 때 그 위로 붓질을 하듯 선으로 그려지는 산수화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무대 위에 현실적인 장치들을 최소화하면서 미니멀리즘을 통해서 관객들이 상상하고 느낄 여지를 최대한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무대 디자인에서 전면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금기시되는 흰색을 과감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던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현실 공간이나 상황에 대한 직유와 은유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강렬한 추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데도 비울 수 있는 만큼 비운 무대 미술이 큰 역할을 했다.

 

 

 

 

 

<맨 오브 라만차> 무대디자이너 서숙진
대표적인 웰메이드 뮤지컬로 언급되는 <맨 오브 라만차>의 한국판 공연이 거둔 성공에는 무대 디자인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긴 계단으로 이어지는 지하 감옥의 깊이감은 달아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의 벽을 실감하게 하지만,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돈키호테의 여정이 시작되면 비루한 여관집 마당뿐만 아니라 거짓말처럼 화사한 해바라기 밭이 눈부시게 펼쳐지기도 한다. 매우 기능적이면서도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도 충실한 무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라이선스 세트를 변형시킨 아이디어로 국내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비주얼적인 압도감 외에도 텍스트에서 말하고자 하는 감정선을 극대화시킨 표현이 세트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 원미솔 음악감독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무대디자이너 정승호
함께 성장했고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결국 감정의 방향이 엇갈리면서 멀어지게 된 친구를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다시 회상하게 된다는 이야기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단 두 명의 배우가 무대를 채우면서 일곱 살부터 30년간을 이어온 긴 인연에 대해서 말하고 노래할 때, 무대가 해야 할 역할은 세상이 변하고 나 또한 달라진 것 같아도 사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시간과 감정에 대해 관객들이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무대는 천국에 있는 하느님의 도서관 같기도 하고, 앨빈의 서점 같기도 하고, 토마스의 서재 같기도 하다.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배경,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이 묵묵히 배경을 채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공연하는 100분간 무대가 해야 할 역할은 모두 다한 것이었다.

 

드라마의 핵심적인 요소인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고급스러운 미적 가치로 승화 시켰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이우형 조명 디자이너

 

 

 

 


<피맛골 연가> 무대디자이너 서숙진
흐릿한 빛 속에 검은 실루엣으로 멈춰 있던 세계가 부드럽게 회전하면서 전면을 드러내면 초가지붕을 얹은 옛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늘어선 무대가 드러난다. 한 귀퉁이에는 영기가 가득한 매화나무가 서있고, 오래 묵은 것들의 정취를 살려내는 그림 같은 무대 속에서 먼저 노래가 흐르다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 같다고 해서 공간감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니다. 초가집 사이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과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감싸고 있는 너른 산등성이가 멀리서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과거에 가졌던 모습을 섬세한 터치로 입체감 있게 재현해냄으로써 관객이 이 작품에 기대하는 바를 만족시키는 데 일조했다.

 

한국의 멋과 정서가 조명과 함께 굉장히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공연하면서  ‘이야, 그림 좋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권도경 음향감독

 

 

 

 


<모비딕> 무대디자이너 여신동
악기가 배우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싸워야 할 거대한 고래가 되기도 하는 액터-뮤지션 뮤지컬 <모비딕>에서 무대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되 맨해튼의 술집부터 드넓은 바다에서 맞닥뜨려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까지 모두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이 뮤지컬은 흡사 로드무비처럼 집에서 가장 먼 곳까지 떠났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주변의 풍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모비딕>의 무대는 각각의 고뇌를 안고 있는 남자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적절한 깊이감과 정조로 관객들이 그 사연들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미니멀한 무대가 인간 군상의 심리묘사를 펼치는 데 탁월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특히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의 공간적 실루엣은 공연을 보는 내내 진짜 배에 승선한 기분이었다.  뮤지컬 해븐 박용호 대표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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