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니아라면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에서 게이의 영향력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프로듀서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은 게이다.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스티븐 손드하임, 엘튼 존, 그리고 안무가 제롬 로빈스와 마이클 베넷 등 브로드웨이 유명 창작자 상당수가 게이다. 뮤지컬을 즐기고 뮤지컬 제작에 종사하는 게이 남자들을 일컫는 ‘쇼퀸(Show Queen)’이라는 호칭이 있을 정도다. 대체 뮤지컬의 어떤 점이 게이들을 매료시키는 걸까. 뮤지컬이 게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이며, 게이들이 더욱 열광하는 작품들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게이가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유
우선, 뮤지컬에는 ‘게이 감성’이 녹아 있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게이 창작자들이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만 만든 것도 아니고 게이가 아닌 창작자들도 많은데, 뮤지컬에서 게이 감성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게이 감성’이란 동성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뮤지컬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는 성의 구별이 흐릿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뮤지컬에서는 기존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성 역할을 부각시킨, 강력하고 일관된 남성성을 유지하는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뮤지컬은 음악으로 드라마를 전개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이야기를 하다가 대뜸 노래를 부른다. 상대에게 하는 말이든 내면의 목소리든, 뮤지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연극적 약속이지만 무척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현실에서 아주 진지하거나 거친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노래를 한다면 미친놈처럼 보이겠지만, 뮤지컬에서는 이런 표현법이 용인되다 못해 타고난 성질로 인정받고 있다. 노래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이다. 악랄한 살인마와 비열한 건달, 질 나쁜 비행 청소년들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면, 그들의 외면과는 다른 감성적인 내면이 드러난다. 강한 남성성과 여린 여성성이 혼재하는 것이다. 뮤지컬 속 캐릭터들은 극단적으로 남성적이지도 완전히 여성적이지도 않은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까.
흔히 뮤지컬을 판타지물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든, 마음속에 품었던 꿈이든, 뮤지컬은 노래와 춤을 통해 이를 환상적으로 구현해낸다. 분명 팍팍하고 거친 현실보다는 장밋빛 꿈과 희망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르이다. 세상이 바뀌고 꿈이 실현되는 대부분의 뮤지컬 엔딩이 대중들을 감동시킨다. 현실을 막아선 장벽이 높은 이들일수록 더욱 환상을 꿈꾸고 바랄 것이다. 따라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바꿀 수 없는 성 정체성으로 고통받는 게이들에게 뮤지컬 속 환상은 더없이 달콤하다.
게이는 여전히 무대 아래에
뮤지컬과 게이가 진한 연대감을 느끼는 듯해도, 대중들이 즐기는 뮤지컬에 사회적 핍박을 받는 게이가 얼굴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뮤지컬에 동성애자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전에 게이들은 어떤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했을까. 도로시와 함께 마법사를 찾아 떠나는 겁 많은 사자와 심장이 없는 허수아비(이들도 기성 사회에서 소외받았다), 그리고 조금 의외지만 여성 디바들이었다. 대체 디바가 게이들의 선망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출신이 어떻든 춤과 노래에 재능이 있어 화려하고 파워풀한 무대를 선보이는 디바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보다 더 멋지고 능력을 인정받는다. 전통적인 성 역할에 도전하는 권력을 갖는 것이다. 게다가 매력적인 남성의 사랑까지 쟁취한다. 이만하면 게이들이 동경할 만하지 않은가. 남성보다 더 강하고 멋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은 게이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고 또 충족시켰다. <오즈의 마법사>와 <퍼니 걸>, <빅터 빅토리아>, <거미여인의 키스>, <에비타> 등에 출연했던 주디 갈런드와 에델 머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줄리 앤드루스, 치타 리베라와 마돈나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브로드웨이 디바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때, 게이들은 그들을 추종했다. 무대 위에 자신들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선망하는 인물들은 당당히 무대를 지배했다.
1966년 <카바레>가 공연됐을 때, 평론가들은 그 독특한 형식에 집중했다. 후에 이 작품은 동성애나 양성애를 더욱 눈에 띄게 다뤘지만 초연에서는 미미하게 표현되었고, 평단도 동성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전히 동성애는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 시기에, 처음으로 게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레스토랑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에게는 음식을 팔지 않도록 규제하는 것을 비롯해, 인권을 침해받는 데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어서 게이들이 사회에, 특히 브로드웨이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69년 스톤월 항쟁이다. 1969년 6월 27일, 게이들이 추종하는 주디 갈런드의 장례식 날, 뉴욕에 위치한 게이 바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 게이들이 모였다. 오랫동안 억압받아왔던 게이들은 그곳을 들이닥친 경찰들의 단속에 단단히 화가 났고 그에 대항했다. 그리고 그날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매년 6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게이 퍼레이드를 열게 되었다.
게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그들의 권리 보장과 사회적 장벽 철폐를 주장함으로써, 게이 창작자들은 커밍아웃했고 게이 캐릭터가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코코(Coco)>(1969)에는 악역이긴 했으나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게이임을 공인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갈채(Applause)>(1970)의 미용사 역은 처음으로 호감 가는 게이로 그려졌으며, 이 작품엔 게이 바가 등장하기도 했다. 게이가 등장하되 성 정체성으로 인한 고민을 드러낸 것은 <코러스 라인>(1974)이 처음이다. 게이인 폴이 코러스 오디션 면접에서 그의 성적 취향 때문에 받았던 핍박이나 어려움을 토로하는 장면이 삽입됐다. 하지만 여전히 게이 캐릭터는 비주류 작품에 등장하거나 희화화되고 단순히 성적인 만족만 추구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게이들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게이를 혐오하는 사람들 또한 많아졌다.
동성애가 대중이 즐기는 소재로
1983년 찰스 스트라우스와 알란 제이 러너는 <조금 더 가까이 춤춰요(Dance a Little Closer)>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로맨틱한 동성애 커플을 탄생시켰다. 두 남성 커플이 러브 송을 부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개막일에 막을 내렸다. 몇 달 후, 처음으로 게이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 개막했다. 국내 초연을 앞두고 있는 <라 카지 오 폴>(한국 공연 제목은 <라카지>)이 그것이다. 중년의 게이 커플이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돈과 상견례를 하면서 겪는 해프닝을 그리고 있는데, 게이들을 위한 사회적 돌파구가 된 데다가 재밌기까지 해서, 보수적인 관객들까지 이 작품에 환호했다. <라 카지 오 폴>은 게이의 삶과 사랑을 극의 중심에 놓았는데도 흥행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유명한 작가 겸 배우 하비 피어스타인이 이 작품을 썼는데, 그도 게이다.
하지만 게이들은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다시 세상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게이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후에 에이즈라고 명명된 질병 때문에 음지보다 더 깊은 저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공연계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게이 창작자들도 목숨을 잃었다. 1980년대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제작이 주춤했던 이유 중 하나가 창작자들의 부재였는데, 그 원인에는 에이즈가 한몫했다. 이때부터 게이 창작자들은 그들이 직면한 사회적 편견과 에이즈의 공포를 극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래리 크레이머의 <노멀 하트>, 테렌스 맥널리의 <사랑! 용기! 연민!>, 토니 커쉬너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 같은 연극이 대표적이다. 윌리엄 핀의 게이 3부작 중 하나인 <팔세토(Falsettos)>(1992)는 토니상에서 극본과 음악상을 거머쥐어 공연계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영화나 공연에서 동성애자와 에이즈 문제가 거리낌 없이 거론되었다. 국내에도 소개된 <렌트>(1996)가 그 예이다. <렌트>는 개막 후 엄청난 관심과 찬사를 받았고, 그 성공은 동성애가 상업적으로 즐길 만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를 완전히 포용한 것은 아니었다. <라 카지 오 폴>이나 <렌트>는 동성애자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안으면서도, 이성애자들의 관점에서 그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표현했기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관객 모두를 만족시켰다. 이후로는 동성애가 브로드웨이에서 환영받는 소스가 되었다. 200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프로듀서스>는 브로드웨이의 실상을 패러디한 코미디로 토니상 12개 부문을 휩쓸며 크게 흥행했다. 뮤지컬을 만드는 좌충우돌 해프닝은 큰 웃음만 남긴 것이 아니라, 역시 브로드웨이를 움직이는 것은 게이들이고 그들이 만든 작품이 성공한다는 현실적 명제를 재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자, 이것 또한 전처럼 신선하고 자극적인 소재는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게이 코드가 미묘하게 담겨 있는 작품들이 더 흥미로워졌다. 이성 간의 사랑을 초월한 이야기를 하되 캐릭터의 성 정체성을 뚜렷하게 규정하지 않는 작품들이라면, 모든 이들이 감정 이입할 수 있지 않을까. <빌리 엘리어트>(2005)에서 소년 빌리는 여자들만 배우는 발레에 빠져든다. 그가 여자인 데비보다 남자인 마이클을 대할 때 더욱 애틋해 보이며, 그는 커서 루돌프 누레예프 같은 발레리노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가 게이가 되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통적인 성 역할과는 다른 길을 가는 소년에게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게 된다. 두 소녀의 우정과 성장담을 다룬 <위키드>(2003)는 어떤가. 두 여자 주인공이 룸메이트로서 만났다. 첫 만남에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희한하게 싫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이게 무슨 느낌일까(‘What Is This Feeling’) 털어놓는 곡은 마치 연인들이 사랑을 쌓기 전에 티격태격 줄다리기를 하며 부르는 러브 송을 닮았다. 이 작품에서는 강력한 남성 캐릭터 없이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이것이 이성애자들에게는 흐뭇한 우정으로 보일지라도, 동성애자들은 조금 다른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관점은 관객마다 제각각 다르니, 일거양득의 효과라고 할까.
게이 집중형 뮤지컬
이성애자들도 두루 즐기는 대중적인 작품 외에, 게이들에게 좀 더 집중한 작품들도 있다. 물론 대부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소규모로 공연되고 있다. 게이 창작자와 게이 스태프, 게이 관객들이 즐기는 게이 뮤지컬들은 당연히 게이들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한다. 게이 코드가 많이 숨겨져 있기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게이들의 시각에서 재해석돼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뉴욕 렉싱턴 가에 위치한 요크 시어터는 매년 서너 편의 신작 뮤지컬과 리바이벌 공연을 올리는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이다. 이곳에서 소개된 신작 뮤지컬들은 좀 더 상업적인 브로드웨이로 진출하기도 하고,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나 아우터 크리틱스 서클 어워드 등의 시상식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완성된 작품 외에 리딩 공연이나 워크숍도 자주 열리는 곳인데, 게이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도 자주 선보이고 있다.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를 모으고 있는 <쓰릴 미> 역시, 미드타운 시어터 페스티벌에 참여한 후 이곳에서 정식으로 공연됐다. 레즈비언 작곡가가 고전 러브 스토리에 퀴어 코드를 더해 재창작하는 작업 중에 일어나는 해프닝을 담은 <게이 그림스(Gay Grimms)>(2007)란 작품도 소개된 적 있다. 2005년 뉴욕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첫선을 보인 후 요크 시어터에서 공연된 <양크!(Yank! A WWII Love Story)>는 세계 2차 대전을 배경으로, 군 매거진 ‘양크(Yank, the Army Weekly)’를 만드는 게이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극 중 배경에 맞춰 1940년대 뮤지컬 스타일의 음악으로 오마주를 드러내기도 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전 남자 친구와 부모님 등의 방해 공작에 시달리는 두 게이가 주인공인 <마이 빅 게이 이탈리안 웨딩(My Big Gay Italian Wedding)>이 세인트 루크 시어터에서 공연되는 등 오프브로드웨이 곳곳에서는 게이들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매일 밤 펼쳐지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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