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는 딱딱하지만 사극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주입한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매력적인 상상력이 팩트와 픽션의 빈틈을 메워주고, 지나간 역사를 이 시대에 환기하는 원동력이 된다. 뮤지컬에서도 물론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흥미롭게 재조명하는 작품들이 있긴 했지만, 그 변주된 이야기가 현대의 정서와 만나는 데 있어서는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혜진 예술감독 취임 이후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하는 컨셉으로 창작의 방향을 정한 서울예술단은, 그래서 특히 ‘공감 가능한 내용과 형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작 <푸른 눈 박연>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우리 역사’에 무게를 둔다. 금발 머리에 흰 피부, 푸른 눈의 외국인을 보면 뒷걸음질하는 모습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물며 서양 문물과의 교류가 드물었던 조선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푸른 눈 박연>은 이런 호기심을 구체화시켜 조선 땅에 출현한 낯선 존재의 우리 문화 체험기를 가무극으로 그려냈다.
이 작품은 <하멜 표류기>의 짧은 한 줄 기록을 바탕으로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의 삶을 상상해 재구성한 데서 출발한다. 실제 역사 기록 속 15일간의 공백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들어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창작의 여지가 숨어있던 역사인 셈이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과 나가사키 총독과의 대화에서 시작되는 <푸른 눈 박연>은 하멜보다 20여 년 먼저 조선에 도착한 벨테브레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조선인 박연’으로 남은 사연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조선인 ‘박연’으로 변모하는 과정에는 해프닝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다문화주의와 맞닿은 고민마저 담겨 있다.
드라마의 전개는 소박한 편이다. 박연을 중심으로 순박한 두 남녀 캐릭터가 등장해 그를 보좌하는데 이로부터 극의 화학 작용이 발생한다.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보편의 정서가 이 두 캐릭터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훗날 박연과 하멜의 운명이 엇갈리는 것에 대한 관객의 의문을 해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칼의 시대’에서 ‘총의 시대’로 전환되던 격변기의 조선에 출현한 서양인과 조선인의 만남은, 곧 전 지구적 인간애와 인류애를 요구하는 현재 다문화 사회의 목소리와 연결된다.
스태프의 면면을 보면 작품의 정서를 미리 엿볼 수 있다. 안무가로 더 잘 알려진 이란영이 연출을 맡은 이번 작품에선 <막돼먹은 영애씨>의 김효진 작가가 가세해 유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김경육 작곡가는 서양 음악과 전통 음악을 아울러 웅장한 선율과 함께 이방인과 조선인의 운명적 만남을 표현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극 못지않게 무대 미술과 영상 디자인이 돋보인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원근법을 활용한 상징적인 무대로 그려지며, 판화 기법인 에칭이 활용한 영상으로 초현실적인 느낌을 부각시킬 예정이다. 에칭은 박연과 동시대이자 동향(同鄕)의 화가였던 렘브란트가 주로 썼던 기법이기도 하다. 박연 역은 지난 5월 <윤동주, 달을 쏘다>로 서울예술단과 호흡을 맞춘 김수용과 서울예술단의 이시후가 나눠 맡는다.
11월 10일~17일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 02) 523-0986
한 줄 평: 역사의 재현 자체보다 해석의 수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것.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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