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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마마 돈 크라이> 뱀파이어가 되려면 엄마를 울려야 한다 [No.88]

글 |정수연(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MJ Starfish 2011-01-14 5,036

<마마 돈 크라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은 대학로 무대에서 공연되는 수많은 ‘엄마’ 연극들이었다. 이제 뮤지컬에도 눈물 바람이 부는구나, 제목도 ‘엄마, 울지마’라니까. 부모와 자식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평생의 갈등 관계이니만큼 반성과 용납으로 끝이 날 수밖에 없는 안전한 감동의 소재이다. 이런 소재라면 뮤지컬의 감성과 만나기에 적절할 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엄마’ 이야기가 아니란다. 뱀파이어 이야기라는 거다. 제목과 소재는 작품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사전 정보의 기능을 갖는 법인데, 엄마보고 울지 말라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라니. 이건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벌써 제목과 소재가 보여주는 서사적 배치가 독특하지 않나.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인 ‘엄마’의 세계와 경계의 불안을 본질적인 정체성으로 삼는 ‘뱀파이어’의 세계가 어떻게 섞일 것인지, 이 작품은 관객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일단 성공한 셈이다.

 

 

 

 

 

 

 

 

 

 

 

 

 

 

 

 

 

 

 

 


이 작품이 이야기의 독특함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은 공연의 형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언뜻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 극을 모노드라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엄연히 두 명으로, 멀티맨으로 기능하는 ‘가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독백을 통한 회고가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사건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낸다. 이런 장치는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기에 적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주된 화술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주인공의 고백이다. 이것은 모노드라마의 구조에 가깝다. 모노드라마가 뭔가. 자기 이야기하는 거잖나. 이런 형식은 뱀파이어의 자기 고백이라는 독특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꽤나 적절하다. 최소한의 설정은 창작의 재치가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공연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딱 나왔다. 모노드라마가 재미있으려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 이야기 자체가 극적이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솜씨가 끝내주거나. 이야기가 극적이면 그저 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해도 흥미진진할 테고, 만일 바람 숭숭 새는 허술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야기꾼의 솜씨가 훌륭하면 이야기의 틈새 정도는 넉넉히 메울 수 있다. 이야기의 논리 여부가 이야기꾼과 관객 사이의 친밀함을 감히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마마 돈 크라이>는 한 가지 조건만큼은 넉넉히 거머쥔 셈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꾼들이 두루두루 돋보이니 말이다. ‘이야기꾼들’의 범주는 배우를 비롯해 음악과 무대 등등 꽤나 넓다. 거의 혼자서 극을 끌어가야 하는 특성상 배우의 역량과 매력이 절대치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극의 배우인 허규는 소년다움과 멋스러움을 오가며 제 몫을 해냈다. 훌라후프처럼 떠있는 달이 휑뎅그렁하긴 했지만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대도 어색하지 않았고, 서정적이면서도 파워풀한 록음악은 극의 주조와 잘 어울렸다. 특히나 이 작품의 음악은 달달한 사랑의 정서뿐 아니라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를 변용하는 재치에, ‘Half Man Half Monster’ 같은 넘버에서는 장엄함까지 담아낸다. 밴드를 소재로 삼은 뮤지컬에서 듣던 음악보다도 더 밴드다운 음악이었다면 과장일까. 적잖은 창작뮤지컬의 음악이 감미로움을 향한 강박관념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것에 비할 때 이 작품의 음악은 확연히 구별된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완성도가 빈약하지 않다면 이 작품은 이미 많은 미덕을 갖춘 셈이다. 이야기꾼들의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여기에 이야기만 재미나면 부족한 게 뭐가 있으랴. <마마 돈 크라이>에는 온갖 이야깃거리가 다 모여있다. ‘노벨물리학상을 거부한 천재과학자가 뱀파이어가 된 후 수많은 여자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언뜻 음울한 흡혈귀의 이야기를 떠올리겠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소한 소재들을 모두 나열하면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수줍지만 뛰어난 천재 소년, 그 천재 소년이 짝사랑하는 긴머리 소녀, 그 소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발명한 타임머신, 그거 타고 다니다가 만난 드라큘라, 확 드러나지는 않지만 묘하게 풍기는 동성애적 관계, 드라큘라에게 한 방 물리고 난 후 얻게 된 필살 매력, 모든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매력남으로 거듭나기 등등. 이건 동화적인 상상력에서 동원될 수 있는 최대치이다. 노벨물리학상에서 시작해 타임머신을 거쳐 드라큘라까지 찍고 올 정도라면 이 이야기는 임파서블 드림의 네버엔딩 스토리로 보아야 한다. 죽음과 삶, 동경과 두려움, 빛과 어둠, 매혹과 몰락의 경계선에서 주체의 절대성을 의심케 하는 흡혈귀의 모티프는 애초부터 이 작품과 거리가 멀었던 거다.


물론 흡혈귀 이야기라고 해서 이런 동화적 설정에 가볍게 쓰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뱀파이어라는 소재 자체가 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홀라당 까먹고 넘어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건 작가의 맘이지 관객이 좌지우지할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뱀파이어의 가장 큰 숙명인, 파괴를 동반한 사랑의 이야기는 이 작품에도 등장하지 않던가. 이웃집 늑대 인간에게 힌트를 얻었는지 보름달이 뜨기만 하면 사랑하는 여인의 고운 목이라 하더라도 송곳니를 박아 넣어야 하는 뱀파이어의 슬픈 사랑. (그런데 정작 사랑하는 여인을 잃는 까닭은 자신이 뱀파이어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임머신의 시간을 잘못 계산했기 때문이었으니 주인공의 ‘뱀파이어다움’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아쉬운 건 이런 거다. 차라리 동화적인 황당무계함으로 일관했더라면 젊고 똑똑하고 해맑은 뱀파이어의 고백을 듣는 것이 나름 즐거웠을 게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천재 소년의 콤플렉스 밑바닥에 엄마의 사랑, 엄마의 꿈을 이유로 집어넣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소심하고 수줍은 아들이 사랑을 찾지 못할까봐 끝없이 소개팅을 주선하고, 그 만남에 실패할 때마다 눈물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마마 돈 크라이>의 정체였다니. 이런 설정은 허탈함을 넘어서 기막히기까지 하다. 천재적인 아들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세계에 갇히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모성은 눈물 나지만, 이쯤 되면 뱀파이어 모티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민망한 소재에 불과해진다. 뱀파이어라는 경계선적 존재의 주체성이 결국 엄마와의 관계로 귀착된다는 것이니 이게 무슨 퇴행이란 말인가. 뱀파이어가 된 자기 자신에게 안타고니스트로서 맞서는 자아의 동기가 고작 마더 콤플렉스라니. 이 작품에 뱀파이어의 이야기는 없다. 단지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망으로 똘똘 뭉친, 엄마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있을 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실패한 성장 드라마이다. 성장이란 자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틀 깨기이다. 자의식에 균열을 내는 상실을 경험함으로써 자신 안에 타자의 시선을 공존케 하는 것.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런 덕목이 과연 성취됐을까. 동화는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의 논리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상실을 경험케 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동화적이지도 않다. 뱀파이어물도, 동화도 아닌 이 이야기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정체성을 찾으려면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려면 엄마를 울려야 한다. ‘엄마, 울지마’의 강박을 벗어나길. 뱀파이어의 삶을 포기하려는 주인공에게 진심으로 바란다. 제대로 된 뱀파이어가 되셔요. 평생 엄마랑 사느니 여러 여자 울리며 사는 게 훨씬 더 멋지답니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8호 2011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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