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꽃향기 가득한 리전트 파크에서 막이 오르는 오픈에어시어터의 뮤지컬 공연은 런던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다. 뮤지컬 <랙타임>과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을 번갈아 공연하는 올여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서 관객들이 우산을 쓰고 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측에서는 우천으로 인한 공연 취소율이 6%에 불과하다며 날씨 걱정으로 망설이는 관객들의 매표를 재촉했다. 역시나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 월요일 저녁, 방수 점퍼에 하얀 우비를 덧입고 우산까지 따로 챙겨든 모습으로 공원에 들어서는 관객들은 하나같이 우천 시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빨강, 분홍, 노랑, 색깔마다 향기가 다른 꽃들이 만발한 공원 길을 10여 분 걸으면 나무로 만든 오두막처럼 생긴 박스 오피스가 나온다. 공연장 입구로 들어가면, 피크닉 파라솔과 의자로 꾸며진 무척 운치있고 예쁜 극장 카페가 나타난다. 7시 반이 넘었는데도 아직 환한 저녁, 야외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며 공연을 기다리는 시간은 제법 낭만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튜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극장 안으로 들어서면 비를 맞아 잎새가 더욱 푸르러진 나무들 사이로 아담하게 자리한 무대가 보이고, 그냥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숲 속의 객석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좌석을 찾아 비에 젖은 접의자의 좌석을 털고, 신문지를 깔고 앉자 다행히도 비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전설적인 아메리칸 히어로가 대거 등장하는 무대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듯 아직 미세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무대 뒤쪽으로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사진과 함께 ‘Dare to Dream’이라는 모토가 쓰인 커다란 현수막이 가운데가 북 찢어진 채 높이 걸려 있다. 아래쪽에는 망가진 피아노와 반만 남은 빨간 포드 자동차 등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무대 앞에는 돌멩이들이 잔뜩 쌓여 있다. 왼쪽에는 낡은 기중기가 한 대 서 있다. 폐허가 된 공사장을 연상시키는 공간에 배우들이 하나둘 나타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후드티를 입은 젊은 흑인 여자, 양복을 입은 남자, 레고 세트를 가지고 노는 백인 꼬마, 옛날 군복을 입은 흑인 남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무대를 채운다. 인종과 외모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우울한 절망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정계 인사가 연설을 하는 듯한 내용의 방송이 들린다. 경제난과 공황, 실업, 이런 단어들이 간간이 들린다. 갑자기 전투기 지나가는 소리가 귀청을 터뜨릴 듯 크게 들리고, 구급차의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가른다. 레고를 가지고 놀던 꼬마가 일어나 구석에 놓인 낡은 축음기를 신기한 듯 구경하다가 나팔관에 대고 ‘Anyone There?’ 하고 묻는다.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축음기 옆에 달린 태엽을 감자 마법처럼 음악이 흘러나온다. ‘라라라, 에브리원 윈’ 하고 노래하는 흥겨운 흑인풍의 옛날 노래다. 그러나 레코드판이 낡은 탓인지 이내 같은 구절만 계속 반복하다 멈춘다. 대신 재즈 선율을 닮은 피아노 소리가 신명나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아이 아버지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랙타임>은 1902년 뉴욕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축음기를 틀었던 남자가 바로 아마추어 모험가를 꿈꾸며 북극에 가고 싶어 하는, 뉴욕의 유복한 집안의 ‘아버지’ 역할이고, 무대 한쪽에 버려진 망가진 우산을 주워 들며 그의 옆에 서는 여자가 그의 아내이자 레고를 가지고 놀던 아이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인 젊은 청년과 나이 지긋한 흑인 ‘할아버지’가 한 일가를 이룬다. 인종차별과 노동 착취가 심각하던 20세기 초 정치·사회적인 격동기에, 이 상류층 가족은 ‘랙타임’이라는 흑인 음악이 미국 문화의 본류로 합류하던 시대를 겪으면서 변해가는 세상을 몸소 체험한다. ‘아버지’는 북극에 가겠다고 모험 길에 나서면서 집을 오래 비우는 바람에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지만, 그동안 남은 가족들은 마당에 버려진 흑인 갓난아기를 발견하고 흑인 처녀 사라와 그의 애인인 할렘의 뮤지션 콜하우스 워커의 인생에 끼어들게 된다. 그로 인해 인종차별의 현장과 이민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간다.
J. P. 모건이 금융계의 대부로서 한창 부를 축재하고 포드 자동차 사장이 독점 재벌로 부상하는 중이다.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커다란 금고 위에 앉은 채 기중기에 매달려 공중에서 멋지게 등장하는 J. P. 모건의 모습이나, 스무 명이 넘는 코러스가 노란색 ‘포드’ 앞치마를 입고 스패너를 들고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웅장한 발걸음으로 등장하는 헨리 포드의 이미지는 ‘성공의 땅’ 아메리카의 옛날을 화려하게 재현한다. 여기에 세계적인 부를 축적한 미국 재계의 히어로와는 반대로 노동 착취에 반대하며 노조 운동을 벌이는 여성운동가 엠마 골드먼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타파를 위해 싸우는 흑인 지도자 부커 T. 워싱턴 등 어둠의 시대에 빛을 밝혔던 사회적인 리더들도 함께 등장한다.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하는 엠마 골드먼 역의 탬신 캐롤의 열연이 돋보이고, 부커 T. 워싱턴을 여성 버전으로 멋지게 소화해내는 흑인 여배우 소피아 놈베테의 강한 존재감이 인상적인 무대였다.
<랙타임>에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계의 전설적인 인물들 역시 대거 등장한다. 온몸이 사슬로 묶인 채 자물쇠로 채워져 기중기 끝에 매달려 있다가 순식간에 모든 걸 다 풀어헤치는 스턴트맨 해리 후디니, 무대 꼭대기에서 그네를 타고 서커스 걸처럼 아름답게 노래하는 전설적인 모델 이블린 네스빗 등 백 년 전의 스타들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번 오픈에어시어터 공연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순간은, 정신없는 뉴욕을 벗어나 휴가를 떠난 주인공 가족들이 애틀랜타에 도착할 때, 찢어진 대형 현수막 사이로 그네를 탄 이블린이 요정처럼 등장하여 ‘Atlantic City’를 부르는 장면이다. 형형색색의 스트라이프 의상을 입고 노랑, 빨강 우산을 든 코러스들이 광대처럼 신나게 춤을 추는 가운데, 이블린이 부르는 재즈 선율은 무척 아름답다. 그리고 스턴트맨 후디니가 기중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묘기를 부리며 탈출하는 장면에선 코러스의 화려한 합창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격동기의 단면
<랙타임>은 1975년 E. L. 닥터로우의 동명 소설에 기초한다. 인권 보호와 평등사상 대신에 각종 압제와 착취가 만연했던 1900년대 미국을 조명한다. 그 시대를 풍미했던 ‘랙타임’이라는 음악 형식을 제목으로 삼으면서, 엇박자와 당김음이 많은 흑인 음악을 통해 우여곡절의 격동기를 그린다. 상류층 백인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실제 주인공은 그들이 만나게 되는 할렘의 랙타임 뮤지션 콜하우스 워커이다. 이 작품은 흑인으로서 그가 겪는 인종차별의 현실과 그로 인한 분노, 그리고 여자 친구 사라가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대통령 후보에게 접근했다가 암살자로 오인받고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다. 분노한 워커는 방화와 폭파 위협으로 세상에 항거했고,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내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렇게 20세기 초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강렬한 음악과 화려한 무대로 엔터테인먼트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랙타임>은 1996년 토론토에서 세계 초연을 가진 후 1998년 브로드웨이 포드센터에서 오픈하여 2년간 공연했다. 1998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무려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디즈니의 <라이온 킹>에 밀려 여우조연상과 음악상, 대본상, 오케스트레이션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영국에서는 2003년 웨스트엔드의 피카딜리 극장에서 마리아 프라이드만이 ‘어머니’ 역으로 출연해 3개월 동안 공연했으며, 2009년에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프로덕션이 한 달간 공연했다.
런던에서는 두 번째 공연인 이번 오픈에어시어터 프로덕션은 야외무대의 장점을 한껏 살린 연출가 티모시 쉬더의 역량이 돋보였다. 기중기와 간소한 소품만으로 폐허의 느낌을 살리고 절망의 시대를 표현한 존 바우소르의 무대 디자인도 효과적이었다. 랙타임의 엇박자를 훌륭히 살리면서, 흥겨운 흑인풍의 댄스뿐만 아니라 정지한 코러스의 타블로 장면을 연극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한 안무가 자비에르 드 푸르토스의 노력이 돋보였다. 또한 오픈에어시어터에서만 가능한 환상적인 장면이 눈에 띄었다. 2막이 시작되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무대에서 사라의 죽음에 분노한 워커가 그녀를 죽인 소방대장에 대한 조사를 요구한다. 그가 솔로로 열창하는 ‘Coalhouse’s Soliloquy’에 이어, 코러스가 합류한 ‘Coalhouse Demands’는 애절하게 절규하는 합창곡으로 발전한다. 코러스들은 무대 양편으로 갈라서 대치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장면은 빛이 사라져가며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자연 조명을 활용해 멋지게 연출된다. 한쪽에서는 흑인 코러스들이 애통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반대쪽에서는 백인 코러스들이 화난 목소리로 맞선다. 정지했다가 좌우로 절도 있게 움직이며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안무에 따라 합창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하늘에는 어둠이 빠른 속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무대 위에서 깊어가는 갈등을 대변하듯이. 그리고 2막이 중반으로 치닫을 무렵, 워커가 폭탄 자살대를 만들어 시위를 하다가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은 무대에 눈부신 조명이 들어오면서 안개비 속을 관통했다. 경찰과 대치한 워커의 모습이 강렬한 안개 조명을 받으며 지옥의 입구에 선 듯 극적으로 보였다. 뒤로는 애절한 색소폰 연주가 들리고, 비운의 워커를 바라보며 선 코러스들이 ‘우우우’ 하고 애통의 노래를 부른다. 긴장감이 고조되며 관악기들이 스타카토로 발전하면, 유령처럼 무대에 나타난 부커 T. 워싱턴 역의 흑인 여배우가 최후의 심판을 하듯 버티고 서서 ‘Look What You’ve Done’을 부른다. ‘제 친자식을 버린 네 죄! 네가 한 짓이 무엇이더냐!’고 꾸짖는 그녀의 노래는 안개 속에서 엄숙하게 무대를 압도한다.
다채로운 음악의 향연
프롤로그에서 절망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흥겨운 분위기로 전환하는 향수 어린 랙타임 선율을 비롯해, 흑인 가스펠을 닮은 애가 ‘Make Them Hear You’, 사랑스러운 재즈풍의 ’Sarah Brown Eyes’, 비장한 소울풍의 마지막 합창곡 ‘Wheels of a Dream’ 등 <랙타임>은 음악적으로도 대단히 다채로운 작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르는 첫 듀엣 곡 ‘Good Bye My Love’는 잔잔한 발라드이며, 이어지는 곡인 ‘Journey On’은 여행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낮은 모노톤으로 부르기 시작해 이별을 고하는 어머니의 노래로 더욱 드라마틱한 멜로디로 발전하는 연극적인 곡이다. 이블린이 서커스 걸처럼 그네를 타고 부르는 ‘The Crime of the Century’는 남편이 그녀의 애인을 살해한 사연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오오……’ ‘뱅뱅……’ 하는 코러스가 <스펠링 비>의 어린이 합창 장면을 연상시킨다. 어머니의 솔로 곡인 ‘What Kind of Woman’은 마당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발견하고 부르는 노래로, 한탄 섞인 슬픈 선율로 시작하여 플루트 소리가 가벼운 긴장감을 만들더니 피아노와 바순 소리가 연극적으로 고조되는 넘버다. 어머니 역의 로잘리 크레이그는 고운 음색을 자랑하며 열창해 큰 박수를 받았다. 2막의 솔로곡 ‘Back to Before’에서도 깨어진 꿈과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노래하면서 분노의 절규를 가슴 절절하게 표현했다. 어린 딸을 둔 이민자 타테와 어머니가 만나면서 부르는 발라드 듀엣 곡 ‘Our Children’은 플루트와 피아노의 감미로운 연주로 로맨틱하게 풀어서 참 예쁜 그림을 만들었다. 특히 남녀 꼬마가 무대 한쪽에 손을 잡고 누워 영화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것처럼 팔다리를 아래위로 젖는 장면에서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외에도 이민자들이 외국어로 부르는 ‘A Shtetl iz Amereke’는 팬플루트와 트럼펫, 벨 소리 등을 동반하며 부르는 사람의 국적에 따라 이국적으로 톤을 달리해 흥미로웠다. 야구선수들과 관중이 하나 되어 부르는 합창곡 ‘What a Game’은 ‘플레이볼’ 하는 외침으로 시작하여 쿵짝 쿵짝 하는 흥겨운 반주에 맞추어 선수들이 ‘칵’ 하고 침 뱉는 소리를 효과음으로 활용해 웃음을 자아냈다. 음악감독 나이젤 릴리는 최소한 20명이 필요한 대규모 오케스트라 버전의 원곡을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9인조 밴드로 훌륭하게 재현했다. 거의 모든 곡에 사용되는 플루트 연주는 때로는 지저귐처럼 때로는 가냘픈 비명처럼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재즈 선율을 담은 관악기의 기교가 화려했으며, 신시사이저를 통해 청명한 하프시코드와 향수를 부르는 아코디언, 가슴 절절한 하프와 잉글리시 호른의 사운드로 연극성을 살렸다.
<랙타임>은 다사다난했던 1900년대를 두 시간 반여의 시간 동안 그 시대의 사회적 굴곡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과 엔터테인먼트까지 모두 담아내려 했다. 흑인 청년 콜하우스 워커가 드라마의 중심에 있고, 상류층의 백인 가족이 그를 도우며 내레이터이자 목격자 역할을 동시에 하며 관객이 감정이입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중심 줄거리 외에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전설적인 사업가와 예술가, 엔터테이너가 대거 등장하면서 전체적으로 산만한 구성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 열연을 마다않은 야외무대 위의 배우들에게, 카멜레온처럼 다양하게 색채를 달리하는 음악적 향연에 박수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7호 2012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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