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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팝 오페라 또는 록 뮤지컬 <베어> BARE [No.112]

글 |정예경(뉴욕통신원) 사진제공 |The Hartman Group 2013-01-14 4,986


2000년, 파격적인 소재로 주목받았던 팝 오페라 <베어>가 록 뮤지컬 <베어>로 새 단장해 오프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베어>의 소재는 ‘게이들의 정체성 고민과 사랑’이다. 끈끈한 게이 커뮤니티가 브로드웨이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닐 뿐더러,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작품에는 게이 코드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철저히 상업적이어야만 하는 뮤지컬에서, 오프닝 신부터 반라의 게이 커플들의 정사 신과 키스신을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쿨하디 쿨한 미국인들이 극장 문을 나설 때 훌쩍거리는 놀라운 현상을 뭐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해당 기사는 2012년 뉴욕 프로덕션 공연 리뷰로, 다른 버전과 내용이 상이할 수 있습니다.

 


 

세 청춘들의 엇갈린 사랑
보수적인 가톨릭계 고교에 다니는 피터와 제이슨. 두 사람은 게이 커플이다. 피터는 커밍아웃을 원하지만, 잘생긴 데다 공부도 잘하는 킹카 제이슨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두려워 이를 거부한다.


학교에서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위한 오디션이 열린다. 제이슨은 쉽게 로미오 역할을 따낸다. 줄리엣 역할을 두고 많은 여학생들이 겨루는데, 선생님과 잤다는 루머가 있는 전학생 아이비가 줄리엣 역을 따낸다. 이에 줄리엣 역을 노렸던 제이슨의 누나 나디아는 앙심을 품는다. 나디아는 대마초 등 환각제를 학우들에게 나누어주는 인물로, 아이비를 두고두고 괴롭힌다. 한편, 아이비를 짝사랑하는 맷은 로미오를 증오하는 티볼트 역을 맡게 된다.


연습이 진행되며 시간이 흐르는 중, 제이슨의 생일이 다가온다. 피터는 제이슨의 깜짝 생일 파티를 주도하여 준비하는데, 자신들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의심받는 게 두려웠던 제이슨은 피터에게 왜 이런 파티를 준비했냐며 크게 화를 낸다. 나디아의 중재로 분위기는 전환되고 파티는 무르익어 간다. 나디아가 가져온 대마초 쿠키와 케이크를 먹은 학생들은 모두 환각에 빠져든다. 파티장 한구석, 피터와 제이슨은 커밍아웃에 대해 옥신각신하다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키스한다. 그때 약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아이비가 셀프 카메라를 찍는데, 그 배경에는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버리게 된다.

 

한편 극이 아닌 현실에서도 제이슨에게 끌렸던 아이비는 그를 유혹하고, 맷은 이에 질투를 느낀다. 그리하여 로미오와 줄리엣, 티볼트의 극 중 관계는 현실과 겹쳐지며, 연습의 싸움 장면은 실제 난투극으로 번지게 된다. 난투 사건 후, 나디아는 아이비를 찾아가서 “너는 맷을 이용하기만 했어”라며 비난하고, 동시에 피터 역시 커밍아웃을 거부하는 제이슨에게 “너는 사람을 이용하기만 해”라고 하며 이별을 선언한다. 두 사람은 각자 힘든 시간을 보낸다. 피터는 둘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그를 그리워하고, 아이비와 잠자리를 한 제이슨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 피터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아이비를 차차 멀리하지만, 결국 커밍아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날이 가까워지고, 제이슨에게 거부당한 아이비는 연습마저 불참한다. 연습 대역으로 줄리엣의 모든 대사를 외우고 있던 피터가 낙점된다. 사랑 고백 장면은 현실과 겹쳐지고, 제이슨은 연습 중 실제 키스를 하려던 피터를 밀쳐낸다. 나디아는 연습에 빠진 아이비를 찾아가 책임감이 없다며 비난하는데, 여기서 아이비는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제이슨과 피터의 사진을 보여주며 진실을 말해준다. 나디아는 당황하고, 이를 맷에게도 얘기한다. 무대는 제이슨, 피터, 아이비, 나디아, 맷이 각자의 입장을 토로하는 장면으로 바뀌는데, 여기서 맷은 아이비가 임신을 했음을 알리며, 두 사람의 사진을 학우들에게 전송한다.


강제 커밍아웃을 당한 피터는 다른 남학생에게 모욕적인 일을 당한다. 제이슨은 피터를 찾아가 함께 도망치자고 하지만 너무 늦었다고 거부당한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고 있다. 드디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상연 날.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제정신이 아닌 제이슨은 누나 나디아에게 환각제를 달라고 한다. 무대로 들어가기 전에 약을 잔뜩 마셔버린 제이슨. 로미오의 고백을 읊으며 그대로 무대에 쓰러져 피터 품에 안겨 사망한다.

 

 

 

작정하고 만든 게이에 관한 이야기  
게이도 동등한 인간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춰달라는 것이 게이 커뮤니티와 옹호론자들의 주장일 것이다. <베어>의 제작진은 여기에서 한 발 나아가 게이 커뮤니티를 위해 총대를 멘 격이라고 할 정도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간다. 어차피 게이 이야기란 자체로 이슈화될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기에, <베어>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드라마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마디로, 아예 작정하고 만든 것이다. ‘상업적으로 망할지언정 이 기회에 할 얘기는 다 하겠다. 대신 작품 자체로서는 잘 만들어 보겠다’라는 의지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였다. 프로듀서들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뮤지컬 잡지 <플레이빌>에 파트너를 위해 이 작품을 한다고, 또는 사랑한다고 연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커밍아웃 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이야기의 깊이를 위해 반라의 게이 정사 신을 보여주는 게 뭐 그리 두려웠겠나 싶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인데도 크리에이티브 팀은 화려한 브로드웨이 베테랑들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아마도 커리어를 떠나, 이 작품에 진심으로 헌신할 수밖에 없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진심들이 모여 이 작품의 고유하고도 거대한 에너지가 만들어진 듯했다. <베어>는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으로는 정말 보기 드물게 모든 면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보이는 브로드웨이급 오프브로드웨이 작품이다. 잘 만든 작품의 힘은, 소재가 가진 편견을 넘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실험작이기도 하다. 

 

 

 

깔끔하고 세련미 넘치는 연출이 돋보인 장면   
극중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서브 플롯과 메인 플롯을 넘나드는 장치로 활용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다. 자칫하면 금지된 사랑에 관한 신파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는 단순한 플롯을 복합적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준 작가의 공력이 대단히 크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시간 낭비 없이 속도감 있게 보여준 것도 멋졌다. 예를 들어 제이슨과 피터의 다툼, 아이비와 나디아의 다툼이 동시에 진행되고, 같은 단어를 쓰며 중창으로 발전하는 장면은 연출과 작가의 공고한 협력이 돋보인 장면이다. 각자 다른 입장의 인물들이 돌아가며 노래하다가, 무대 중앙으로 서서히 나와 싸움으로 번지는 장면 역시 볼 만하다.


작품의 안무가는 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댄서, 트래비스 월이었다. 요즘 , 등 브라운관에서 한창 안무가로서 주가를 올린 그를 브로드웨이에서도 볼 수 있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안무는 상당히 박진감 있고 좋지만, 순간순간 예술적인 터치도 보여서 웃음 짓게 된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원한다면 
미국에서의 사회적 약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대교가 아니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남자가 아니거나. 필자가 보기엔, 미국에서의 약자는 더 이상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아니라, 제대로 투쟁도 못하고 차별 대우를 받아도 싸우지 않고 얌전히 있는 동양인이다. 그리고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동양인은 늘 그런 식의 캐릭터로―착하지만 동문서답하고, 스펠링을 틀려도 눈웃음으로 관객을 웃겨주는 멍청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베어>에 대해 말하면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극을 보는 내내 심정적으로 불편했던 점이 딱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극 중 다이앤이란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한국인 여배우 앨리스 리가 이 역을 맡았다. 연기도 노래도 깜찍하게 잘했는데, 문제는 역시나 희화화된 동양인 캐릭터라는 것이다. 단순히 코믹한 연기를 하는 배역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사랑스러운 바보 캐릭터도 아니다, 이 나라엔 영어 잘하고 학력 좋은 동양인들 천지인데도 존재감이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솔직히 제작진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들 보기엔 동양인이 만만한가?’ 일반 뮤지컬에서 전형적인 게이 캐릭터로 웃음을 주고 게이에 대한 편견을 만드는 게 싫다고 성토할 거라면, 당신들같이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동양인 캐릭터를 만들 때 조금은 더 생각해 주길 바란다. 동양인은 우습지 않다. 당신들이 우습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들이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렇게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연기도 잘하는 배우들이, 동양인이란 이유만으로 늘 저런 우스꽝스러운 배역만 맡아야 하는 거라면, 브로드웨이가 주는 희망은, 허상 그 자체라 생각한다. 어쨌든 배우로서 앨리스 리는 훌륭하게 자기 맡은 바를 다해냈다. 

 

 

 

극장문을 나서며…  
<베어>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혼돈과 비극,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아련함을 적절히 섞어놓은 버전으로, 충격과 신파의 감정선을 쥐락펴락한다. 제이슨이 죽고 정적이 흐르면, 어둠 속에서 너도 울고 나도 운다. 이 쿨한 미국이란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싶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베어>는 성공작이다. 이 작품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까지의 의무를 다하며 그 생명을 10년 넘게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순히 상업적인 성공은 오히려 가외의 것이었을지 모르는 작품이 이만한 성과를 이룬 것은 작품 자체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작품성이 관객들을 설득했다. 잘 만든다면 소재는 상관없다. 그 ‘잘’의 기준은 물론,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오느냐, 내 일이 아니라도 내 일처럼 공감이 가느냐가 핵심이겠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줄리엣 역할을 따낸 팜므파탈적 캐릭터 아이비를 맡은 배우는 미안하지만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마도 일반 관객을 설득할 때, 피터와 제이슨 커플보다, 아이비와 제이슨의 조합이 더 예뻐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비 역할을 하는 여배우의 매력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것 같다. 씁쓸하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임신한 채 버림받은 가련한 여성 캐릭터는 동정받아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피터와 제이슨이 잘되길 바라게끔 관객이 끌려가는 이 상황! 심지어 나름 주연 여배우인데도 커튼콜에서 박수도 제일 적게 받는다. 오히려 제이슨의 누나 나디아가 파워풀하고 남성적인 가창력으로 박수를 많이 받는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동양인 캐릭터 다이앤이나, 초코믹 성모 마리아 캐릭터로 분한 여배우도 인기가 높았다.


그렇다. 이 극에서 피터보다 더 여성스럽거나, 더 예쁜 여자 캐릭터는 단 한 명도 없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약간은 유감이다. 여성이 지닌 여성성을 깎아내리면서까지 게이의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것. 여성의 여성성과 게이의 여성성을 동시에 인정할 때 서로의 개별성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하지만 또 한편으론 할 말이 없다. 작정하고 만든 작품이니까. 브로드웨이를 지탱하는 수많은 호모섹슈얼들이 쇼를 만들 때마다 얼마나 자신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겠는가. 디즈니의 꿈과 사랑이,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가 모두 현실이 아니라고 정말 얼마나 알려주고 싶겠는가. 그러니 이 정도는 그냥 이해하고 봐줘야 한다는 결론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2호 2013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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