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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PARIS] 신명 나는 제사로 삶을 찬양하다, <카르카스> CALACAS [No.114]

글 |이동섭(파리 통신원) 사진 |이동섭(파리 통신원) 2013-04-30 4,084

10여 년간의 파리 유학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즈음, 징가로는 현대 예술과 누보 시르크를 결합한 <다르샨(Darshan)>을 발표했다. (<더뮤지컬> 77호 참조) <다르샨>은 비디오 아트와 징가로식 누보 시르크를 결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재미는 덜했지만, 예술감독 바르타바스가 이제 ‘누보 시르크의 현대 예술화’를 본격 시도하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앞으로 전개될 그의 실험적인 새로운 세계를 쉽게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프랑스를 떠난다는 사실이 아프게 실감났다. 하지만 2013년 베를린 영화제에 들르면서 징가로의 신작 <카르카스(Calacas)>를 볼 수 있었다. 파리의 겨울은 여전히 음습했고 차가웠다. 그 변함없음이 반가웠다. 

 

 

 

 

해골을 껴안고 소녀가 달린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젊어서 죽었다. 한창 재능이 피어날 31살에 급작스레 죽었지만, 우리에게 960여 곡을 남겼다. 그중 650여 곡이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등의 가곡이라 ‘리트(가곡)의 왕’으로 불리는데, 그래서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슈베르트 음악의 정수를 가곡에 두는 경향이 있다. 리트부터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슈베르트 음악은 달콤한 멜로디와 화성의 미묘한 변화 등이 어우러져 낭만주의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다. 그중에서 특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곡은 바로 현악 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이다. 죽음을 앞둔 시기에 작곡된 이 곡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슈베르트의 해석이 담겨 있다. 십자가에 걸린 예수 이후로 죽음의 모티프는 서양 예술사에 적극적으로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징가로가 <카르카스>를 만들면서 참조한 듯한 모티프는 건강한 소녀가 해골을 껴안고 춤추는 이미지이다. 카르카스는 멕시코에서 벌이는 사자의 날 우리의 제사처럼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의식기간에 주로 장식용으로 사용되는 해골 형상을 지칭한다. 그림에서 보듯이(사진 a, b)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인들에게 이날은 슬픔과 애도가 아니라 즐겁고 흥겨운 축제에 가깝다. 징가로의 예술감독 바르타바스는 죽음의 상징이 충만한 <카르카스>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마구간을 통과해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대 구조부터 확인했다. 무대와 객석의 위치를 맞바꿨던 <다르샨>과는 달리, 이번에는 예전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일단 안심이다. 말의 그림자만을 보던 <다르샨>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말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건강하게 잘 꾸며진 말을 실제로 보는 일도 큰 즐거움이다). 무대가 예전보다 좀 작았고 늘 라이브 연주를 고집하지만 어디에도 악사의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가만 보니, 이번엔 객석이 무대와 무대 사이에 놓여 있었다. 객석 가장 앞쪽이 원형 무대였고, 가장 뒷쪽을 빙 둘러서 원형 띠의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 이 뒤편 무대로 말들이 뛰어다닐 듯했다. 흙과 짚, 말의 체취가 어우러진 독특한 마구간 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막이 오르면, 무대엔 칠면조가 끼룩끼룩 대며 어슬렁거리고, 버려진 듯한 사람 몸 형상의 해골 인형들이 바닥에 놓여 있다. 이윽고 오르골을 끄는 살아 움직이는 해골 형상(검은 옷에 흰 뼈를 그린 복장의 배우)이 무대 안으로 들어오자, 칠면조들은 놀라서 무대 밖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나가고 해골 인형들은 실에 매달려 춤추듯 천장으로 끌려 올라간다.


징가로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오프닝이었다. 말의 동작과 움직임, 인간의 행동과 연기를 버리고 무대를 한 장의 그림처럼 밀도 높게 만들어내 시각적 충격을 극대화했다. 바르타바스는 이 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이제 여러분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질문인 죽음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날카로움이 서늘하게 빛나는 ‘죽음과 소녀’의 1악장 도입부처럼, 마른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는 듯 강렬한 긴장과 칼로 베어낸 듯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뜻밖의 장면에 객석에는 묘한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해골 인형들이 모두 하늘로 끌려 올라갈 즈음, 객석 뒷편 무대에서 북과 심벌즈로 한 몸이 된 칠레의 길거리 악사 친치네로(사진 c) 두 명이 등장해 죽음의 분위기를 일시에 걷어내고 흥겨움으로 공연장 전체를 물들인다. 좀 전에 충격적인 장면을 잊고 나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신명 나는 음악 공연에 빠진다. 차갑고 날카로운 죽음의 두려움은 뜨겁게 끓어오르는 생의 에너지로 단숨에 뒤바뀐다.  

 

 


 


죽음과 맞닿을 때, 삶은 뜨거워진다                                                                     
박수 치는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리듬이 들끓던 타악 연주를 친치네로가 끝내자, 뒤편 무대로 해골을 매단 말이 사람을 태우고 질주하면 다른 말들이 맹렬히 추격했다. 무대를 인생의 축소판이라 한다면, 돌고 도는 무대는 수천 년 지속된 인간의 삶이고 그 위를 달리는 말은 곧 인간이었다. 등에 사람을 태우고 전쟁터와 땅을 누볐고, 쟁기를 끌던 서양의 말은 동양의 소처럼 땅의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하더라도 모든 생명체는 결국 죽는다. 여기엔 어떤 예외도 없기에 오로지 죽음 앞에서만 인간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권력자들은 이 평등을 벗어나려 불로초를 꿈꾸었고, 권력 없는 자들은 사후에 온다는 영원한 행복을 믿었다.


죽음을 해석하는 서양 철학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생명을 하느님이 주셨듯이 죽음도 그의 의지로 거두어 가니 두려움 없이 맞이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관점, 죽음은 모든 것의 끝으로서 살아있을 때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특히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비롯된 쾌락주의적 관점이다. 로마 후기부터는 대체로 기독교적 관점이 주류를 이뤄왔다. 하지만 니체가 지적했듯이, 기독교적 관점은 일견 죽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은 있지만 인간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삶이 제 것이라고 깨달으려면, 먼저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느껴야 한다. 아는 것은 소용없다. 그 아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때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아는 것이다. 느끼지 못하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삶과 죽음을 종교에 내맡기고는 주체적으로 살기 어렵다. 하지만 기독교로 인해 종교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장악하면서, 인간은 서서히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공동묘지는 도시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현대에는 눈에 띄지 않는 외곽의 으슥한 곳으로 밀려난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죽음을 떠올리기란 대단히 어렵다. 고속도로에서 표시되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나 뉴스에 등장하는 살인사건에서도 우리는 죽음보다는 보험을, 두려움보다는 대비를 생각한다. 결국 죽음에서 배제된 문명일수록 현대인들은 아늑하고 평온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신도 언젠가는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굳이 그걸 알아야 하나? 
   
삶을 비상하게 만들어라                                                                                                     
에피쿠로스는 가장 오해받아 억울한 철학가일 듯하다. 그가 말한 쾌락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와 간단한 먹거리가 있는 소박한 삶이 주는 즐거움이었으나, 쾌락이란 단어에 감도는 음험하고 타락한 분위기 때문에 줄곧 오해받고 있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이상(이데아)에 대한 집착에서 길어올린 주류 철학 흐름에서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이상보다 발 딛고 사는 현실과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의 중요함을 환기시킨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유명해진, 에피쿠로스의 원칙과도 같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고) 오늘을 즐기란 뜻으로 해석된다. 이 말에서 나는 육체적 쾌락이나 방종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주는 뜨거운 뭉클함에 휩싸인다. 그 영화에서 카르페 디엠 뒤에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인다.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하게 만들어라.” 이상만을 따르려는 삶은 머리만 커지게 만들고 그 무게에 눌려 우리는 발 디딘 현실 아래로 가라앉는다. 삶은 추상적 가치의 추구가 아닌 철저한 현실의 바탕 위에서 날아오르기 마련이다. 그 바탕의 시작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삶에서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바르타바스는 말하고 있다. 삶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뜨거워진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내 몸으로 느낄 때, 비로소 내 삶이 내 것이고 나만이 내 삶을 살 수 있음을 절감한다. 그러니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긍정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모티프인 죽음과 소녀는, <카르카스>에서 말을 탄 신부가 하얀 만장을 면사포로 쓰고 해골 무더기를 등 뒤에 태우고 등장한 장면으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바르타바스가 멕시코를 비롯해 남미 문화를 바탕으로 구축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다름 아닌, ‘죽음과 더불어 신명 나게 노는 흥겨운 의식은 곧 삶에 대한 뜨거운 찬양’임을 알게 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4호 2013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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